나우루공화국의 비극 -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
뤽 폴리에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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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의 변호사가 "똥으로 만들어진 섬으로, 똥을 닮았고 똥 냄새를 풍긴다." 고 묘사한 섬. 한때 세계 최고의 GDP를 자랑하며 오세아니아의 중심국가가 되었지만, 그 후 폐허가 되어버린 섬. 이 나우루공화국이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아우르며 나우르의 이야기를 말해 줍니다.

나우루 섬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야자나무로 뒤덮인 땅이였습니다. 당시 새로운 맛을 찾아나선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음식중에 코코넛이 있었고, 유럽인들이 나우루에 와서 코코넛 과육을 말린 코프라를 사가기 시작합니다. 당시 나우루에 정박한 선장 중 한명인 헨리 덴슨은 나무가 딱딱하게 굳어 생긴듯한 돌 하나를 가져갔고, 이 돌이 나우루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단순한 기념품인줄 알았던 이 돌은 1899년 앨버트 엘리스가 보고 분석해본 결과 순도 100%에 가까운 인산염이 검출됩니다. 인산염은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비료의 중요한 성분으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같이 땅이 척박한 나라에선 비료를 보급하는 것이 시급과제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오세아니아로 진출하던 시기였고, 나우루를 지배하던 독일을 비롯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나우루인들은 채굴에 대한 보상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광산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평소 하던 일에 열중하며 살아갑니다.

이 섬의 인산염 매장량은 5억 톤으로 추정된다. 이 비료는 칠레의 유명한 질산염 산지와 견줄 만하다. - 뉴욕타임즈 1918. 9. 29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나우루는 더욱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인산염은 전시에 폭발물 제조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이 전쟁에 참가하며 태평양 지역의 여러 섬들인 과달카날, 미드웨이, 나우루 같은 섬이 주요 전쟁터가 됩니다. 일본군은 나우루에 와서 주민 1700명중 1200명을 강제이주 시키고 500명은 점령군을 위한 노역에 사용합니다. 전쟁이 끝난후 강제이주된 1200명중 737명이 살아서 돌아왔고, 나우루는 다시 신탁통치 하에 들어갑니다. 전쟁 이후 모든 나라는 파괴된 농업을 복구해야 했고, 세계 최고의 인산염 산지로 떠오른 나우루는 세계 농업을 지배할만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은 나우루의 채굴 이권을 나눠가졌고, 나우루인들은 총 수입에서 고작 2%만을 받게 됩니다.

나우루인 해머 드로버트는 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나우루인 가운데 한명이였습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교육받았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우루 인들은 자신들의 섬과 인산염,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였습니다. 드로버트는 귀국 후 지방정부 위원회를 구성했고, 10년이 넘는 투쟁 끝에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인산염 산업은 나우루인들의 것이 되었고, 나우루인들은 일확천금을 손에 얻게 됩니다.

30년정도 채굴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문가와 기술자들의 자문에 따라 드로버트는 인산염이 고갈될 때까지 남은 시간과 돈을 장기적으로 수익을 가져올 수 있는 여러가지 분야에 투자합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더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정부에서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국가 소유였고, 주민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작은 섬이였던 터라 범죄행위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통령부터 가정부까지 모두 동일한 월급을 받았으며 1970년 당시 이 섬의 GDP는 2만달러에 달했습니다. 나우루에서는 가정집의 화장실까지 국가가 청소해 주었고, 배를 타고 낚시를 즐기며, 차 안에서 식사를 즐겼습니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 한 가정에 한대밖에 없던 자동차를 나우루인들은 7대 이상 보유할 수 있게 됩니다. 해외투자도 엄청나게 이루어져 오스트레일리아서 가장 높은 빌딩인 나우루 하우스 빌딩을 지었고, 각종 병원, 호텔, 양조장, 럭비팀 등을 사들입니다. 항공사 에어 나우루는 태평양의 중심지였고, 오세아니아의 모든 항공사들은 나우루 공항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번영 속에서 여러 좋지않은 징조들이 나타납니다. 나우루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사기를 당했는데, 로널드 파울스에게 6000만 달러를 사기당했고, 5000만달러를 주고 산 병원이 사실 부동산업자가 고작 1500만달러를 주고 산 병원이였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수많은 돈들은 다시 찾지 못합니다. 또한 나우루 국민의 아버지였던 드로버트가 죽은 뒤 정치적 불안이 계속됩니다. 22년동안 대통령이 23번 바뀌었고, 나우루 지도자들은 자기 금고와 국고를 혼동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에 예고했던 대로 인산염 채굴은 갈수록 줄어들어갔고, 1997년엔 광산 활동이 최소한도로 줄어듭니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여러 군데에서 빚을 지기 시작했고, 그 빚의 이자가 점점 나우루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우루는 여권, 은행계좌를 팔기 시작해 전세계 돈세탁의 중심지가 되고 전세계에서 블랙리스트로 등록됩니다.

이런 파산직전의 나우루를 여러 국가들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난민을 거부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정권은 나우루에 경제적 원조를 해주는 대가로 나우루를 난민수용소로 활용해 오스트레일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민사회와 비정부기구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만 또한 나우루에 경제적 원조를 해 주었는데, 이는 자국의 주권국 지위를 천명하기 위해 비중있는 동맹국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국때문에 UN에 가입하지 못하는 대신 나우루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UN에 발표하는데 사용합니다. 일본 또한 나우루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대가로 포경산업에 대한 지지를 받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도 이렇게 대가를 받는 조건에서 선뜻 자신의 무언가를 내주는 정책을 썼던 것과 동일합니다.

고립되고 바다로 둘러싸인 이 나라는 보잘것없긴 해도 세계화의 현장이었다. 나우루 섬은 자본주의 경제 특유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스스로 초래하는 부수적인 피해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우루의 몰락을 초래할 것은 전쟁도 혁명도 아니었고, 다른 어떤 외부 요인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이 두 세대 만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모두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나우루에서 제 몫을 챙겨갔고 나우루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의 유럽인들과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영연방 국가들이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우루인들 자신도 그랬다. 돈에 압도당한 나우루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보존할 줄 몰랐다. - p.173

나우루는 자국의 자원을 이용함으로서 극과 극의 역사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나우루는 다시 인산염 2차 채굴을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갑니다. 인산염으로 돈이 생기면, 과거와 같은 실수들은 하지 않게 될까요? 하지만 이미 나우루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주민들은 전통문화를 잃어버렸고, 심각한 비만과 당뇨병을 얻었습니다. 7천명밖에 되지 않는 주민중에서 매일 2명이 당뇨로 죽어갑니다. 국토는 이미 파괴되어 야자수가 가득하던 숲은 황량한 고원이 되었습니다. 급성장하고 있는 두바이를 비롯, 전세계적으로 봤을때 수많은 자원의 사용, 자연의 파괴, 그로인한 풍요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과 사회문제들은 이런 나우루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는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물질적인 안락이 보장되자 자신의 문화를 등한시하고, 자신의 과거를 망각하고, 자신의 환경을 돌보지 않는 인간의 역사, 그것이 곧 나우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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