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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평점 :
1993년 서울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서울의 모습에 큰 의문을 가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아파트에서 사는가? 수없이 많은 대규모의 아파트단지는 프랑스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아파트란 씨테라 불리며 관리 부실과 볼품없는 건축미를 지녔고 젊은 사람들과 하위 계급이 사는 도시문제 발생지역으로 인식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의 아파트 현상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아파트는 서울 주민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중,상류층은 여전히 개인주택을 선호했습니다. 아파트는 서민을 대상으로 한 작은 평수의 주택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였습니다. 게다가 1970년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사태는 높은 건물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이 사고는 부실 공사 탓이라기보다는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의 결함이 빚어낸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후 1971년 완공된 강북의 동부이촌동단지는 아파트단지의 선구적 역할을 합니다. 평수가 80평까지로 늘어나 부유층을 겨냥했고, 아파트 전 세대가 기름보일러식 중앙난방이였기 때문에 개인주택에서 연탄을 사용했던 대다수의 입주자들에게 이 변화는 혁신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동부이촌동단지의 성공을 기점으로 서울 시민이 가지고 있었던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아파트 현상은 유신체제를 지나면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됩니다.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증가를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을 경제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습니다.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소유와 자산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 주택의 공급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발전의 표상이었습니다. 공공 재정의 역할은 미미했지만, 정부 정책에 부응해 주택구입의 재정적 부담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최하위 계층을 포함해 누구든 자신 소유의 주택을 손에 넣으려면 그만한 재산을 동원할 수 있기까지 상당한 물질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 즉 중,상류층에게 유리한 정책적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아파트현상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은 조국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이 수락했던 수많은 물질적 희생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커밍스에 따르면, 이것은 한국 경제 기적을 가능케 했던 중요한 요인인데,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고, 그런 모습은 아파트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71년 유신헌법에 이어 1972년 주택건설촉진법이 공포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국가가 주도한 본격적인 아파트단지 건설은 권위주의 체제를 견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급증은 권위주의 국가 주도의 성장 모델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정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은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분양되는 아파트를 매입하는 것은 큰 수익원이다. 당첨된 가구는 중간계급으로 편입되면서 체제의 수혜자이자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 p.102
1980년대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을 제한했던 도시계획법의 변화는 아파트단지 현상을 가속화합니다. 아파트단지는 강북을 넘어서 강남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강남으로의 분산정책에서 핵심은 학교 이전이었습니다. 정부는 중구, 종로구, 성북구 등에 위치하던 명문학교들을 서울 남동부로 이전할 것을 장려했고 여기서 8학군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기업과 학교를 강남으로 분산시킨 정부 주도의 적극적 정책은 아파트로의 부유층 이전을 부추겼습니다. 이러한 지역의 물질적 변모는 중산층의 유입과 함께 하층이 밀려나는 사회계층적 변화를 수반하고, 애초의 주민들이 그 희생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 계층이 차지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그 대표적 예입니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오랫동안 부유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행되어 왔는데, 이러한 방향은 주택여과과정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게 됩니다. 이런 발달과정은 하위 계층은 부유층이 더 값비싼 최신 주택으로 옮겨 가면서 남기고 간 주택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해 옮겨 간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향적 경제성장 등은 한국적 모델을 특징짓는다. 재분배의 측면보다는 양적 성장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행복이라는 특별한 비전에 접목된 한국적 태도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 낸 한국형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 p.86
이러한 대단지 아파트 현상에 대한 가장 흔한 대답은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땅에 과도한 인구라는 논리가 한국의 아파트단지 현상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고층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반드시 불가피한 것도 아닌데, 협소한 영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델란드나 벨기에에서는 도시로의 집중화가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아파트단지를 인구증가와 주거 공간의 조밀화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간주하는 논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구밀도에 대한 수학적 정의에 기초한다고 해도, 아파트단지가 가장 조밀한 주거 공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증명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울을 예로 들면, 구 단위로 보았을 때 서울의 인구밀도는 주택 구조의 변화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90년대 초 이후, 강북 중심부 아파트의 증가는 인구밀도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중 일부는 인구가 감소했습니다. 1995년 서울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구에 아파트가 가장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초구, 강남구, 노원구의 경우 이 지역의 60~80%가 아파트이지만 인구밀도는 오히려 도시 평균에 못 미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파트의 아파트의 분포가 도시의 인구밀도를 구별하는 주요인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구밀도 지도는 주택 형태의 분포보다는 지형적 특성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산업화가 발달하면서 아파트는 서구적인 것, 현대적인 것을 상징하게 됩니다. 이러한 아파트의 현대성이란 1960년대의 단독주택과 20세기 말의 주택을 대표하는 아파트 사이의 비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다르게 한국 아파트의 특별한 구성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토로했던 한옥의 특징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전통적인 움직임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파트의 공간 구성과 각 장소의 용도를 살펴보면, 외부와 내부의 단절, 한옥과 아파트의 안방의 유사성 등은 아파트가 한옥 구조를 재구성한 것임을 확인시킵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 혹은 전통 가옥을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실제의 공간 구조와 생활양식이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그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프랑스에서 아파트단지는 젊은 세대의 중간계급이 거주했고 얼마 후 이 계층이 단독주택으로 옮겨가면서 가차 없이 버려졌습니다. 그와 반대로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상위 계층에서 시작되었고 중간계급 일반과 하위 계층으로 확산됐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프랑스에서의 아파트는 기피해야 할 거주공간으로, 한국에서의 아파트는 좀더 나은 계층이 되기 위한 꿈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서구적 삶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아파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리의 아파트 구조는 한옥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의 출현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변화였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정부 정책으로 표현되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대단지 아파트는 대규모 도시문제뿐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 공간적 차별화를 낳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차별화를 고착시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이런 게이티드 커뮤니티 현상은 한국의 타워팰리스와 같은 호화 아파트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장기적으로 유지관리 문제가 복잡해질 뿐만 아니라 그 비용이 증가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런 구조는 대단지 아파트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두가지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거나, 한국에서처럼 계속적인 재개발을 해서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한국은 어떤 도시 형태와 사회구조를 발전시키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기초 위에서 어떤 주택정책과 주거 공간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