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유종일 엮음 / 시사IN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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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흔히들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다고 말합니다. 친일이력, 남로당 가입과 남로당 동료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배신한 사건, 유신독재 등의 어두운 면과 경제개발이라는 빛이라는 두가지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경제개발이 남기고 간 폐해들을 짚어보고, 박정희가 남긴 잘못된 경제체제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재벌체제와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구조와 정부의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이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어냅니다. 특권성장동맹은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확대해왔는데, 박정희 향수는 바로 이 성장 이데올로기의 한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일본의 메이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합니다. 당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원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집권 직후 재벌 총수들을 기소하고 부정축재 처리요강을 발표, 당시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취한 부당이득을 모두 환수하겠다는 위협을 가함으로서 재벌들을 군사정권의 통제에 두는 것을 성공하게 됩니다.

국제적으로 발전 당시 한국의 소득분배가 비교적 괜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적 특수상황에 기인합니다. 토지개혁이 단행되었고,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이 파괴됨으로써 자산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극도로 낮은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해 인적자본의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른 편이었으며, 교육시스템이 계층 상승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리한 초기 조건 하에서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실제로 동반성장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분배와 관련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히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반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장점도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해 변하게 되며, 박정희정권 중후반에 가서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발전은 '자유로서의 발전'인 것이며, 진정한 진보는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자유와 신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 아마르티아 센, Development as Freedom 

박정희시절에 생긴 경제의 불평등에서 많은 부분은 지가와 물가에 기인합니다. 소비자물가는 이승만, 박정희 치하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올랐는데, 이승만 정권 때 물가는 3.8배 올랐고, 박정희 정권 때는 11.8배가 오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정권은 모두 1.5배 미만으로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박정희 집권기인 1963년부터 1979년까지의 땅값은 무려 180배 이상 상승했는데, 이 시기에 자산가치가 180배로 늘어난 자산은 토지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국의 땅값은 천문학적 비율로 상승해왔고 거기서 발생한 불로소득은 기존의 소득 통계를 압도하는 규모입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정부의 개발발표와 같은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많은 경우 재벌들의 공장 건설 결정은 생산의 최적화보다는 지가 상승 전망에 더 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건설교통부의 지가 동향과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연보에서 불로소득/생산소득 비율을 보면, 이승만정권은 43.2%, 박정희정권은 248.8%, 전두환정권은 67.9%, 노태우정권은 96.3%, 김영삼정권은 -5.2%, 김대중정권은 -0.6%, 노무현정권은 8.4%에 달합니다. 이승만에서 노태우에 이르는 독재정권 아래서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이 창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동안 국내총생산은 경상가격으로 131조원이 발생했는데, 같은 기간에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은 그 2배 반인 326조나 발생했습니다. 박정희시대에는 정부가 앞장서서 강남개발 등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을 많이 썼고, 그것을 통해서 고도성장을 달성한 면이 부각된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은 최상류층에 집중되었고 경제불평등에 큰 역할을 합니다. 토지가격의 상승이 경제개발처럼 보이는 이런 현상은 마치 일본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거품경제를 연상케 합니다.

비민주주의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독재와 억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면 결국 공정한 룰이 정착되지 못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갈수록 적대적 노사관계나 각종 개발을 둘러싼 갈등 및 님비현상 등 갈등비용이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는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희생이 농민들인데, 농민의 아들을 표방한 박정희의 리더십은 초기에는 농어촌 고리대사업을 실시, 농업구조개선심의 등의 중농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960년대 농업구조 개선방안 마련 실패와 외향적 경제성장의 선택은 농업의 성장을 통한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가격지지와 동원이 사라진 1980년대 이후의 농촌은 도시에 비해 생명력을 상실한 지역으로 전락합니다. 한국 농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농자천하지대본을 천명했던 박정희 정권에서 압축쇠퇴를 경험했고, 국가의 저곡가정책으로 인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량이주는 무제한적 노동공급이라는 노동시장 상황을 만들어 한국경제 발전의 원천인 저임금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정희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의 성장이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박정희 체제의 성공 조건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는 재벌 육성정책이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고용의 확대를 수반하는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재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점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순선환 효과 또는 적하효과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은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힘으로 작용해 재벌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재벌의 선도적 성장을 통해 국민경제 전체의 순선환적 동반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이른바 적하효과 논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고용회피 경향으로 가속화된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서비스경제로의 이행 및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강화와 중소기업의 피폐화라는 두 가지 구조적 변화는 양극화 추세를 가속화했고 이는 급속한 사회불만을 일으켜 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독재적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 Lindert, Peter H. Voice and Growth: Was Churchill Right? 

결국 독재정권 아래에서 실시한 토건경제와 재벌체제, 관치경제는 그 한계가 있으며, 지속가능한 경제가 아닌 일종의 도핑효과라는 것입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에 종속되어 복지 없는 성장을 가져와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소득의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국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됩니다. 한 개인이 노동시장을 떠나서는 자신의 복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품화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고, 이 또한 체제붕괴의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교훈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재벌의 독주는 여전히 유효한 현상이며, 양극화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고, 박정희 스타일의 경제정책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토목건축 위주의 경제부양책과 국가가 관리하는 물가지수 등의 관치경제라는 경제정책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박정희식 경제 패러다임은 그 시효를 다했으며, 그런 식의 성장은 결국 억지 성장이 될 뿐이며, 고용창출이나 양극화 극복을 위해서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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