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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천주교인권위원회 엮음 / 학민사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 이 책은 그 재판인 인혁당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이 낳은 비극입니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있자마자 바로 다음날 처형이 일어난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행태로, 이 사건이 비정상적이며, 지극히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한 권력 장악 이후 박정희 정권이 보인 정치적 행보는 경찰과 군대를 통한 폭력과 억압이라는 일관성을 가집니다. 정권이 표방하는 정치적 목표에 반대하는 의견이 일정 선을 넘는다고 판단될 때, 예외없이 국가 전체에 비상 알람을 울려 댔고,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법살인 입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때때로 영구집권에 대한 흑심을 드러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옮긴 것은 1968년 삼선개헌의 정지작업으로 김종필 직계를 제거하면서부터입니다. 1인 파쇼권력을 획책한 것은 71년 대선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72년에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유신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정희는 유신권력에 반대할 소지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는데, 여당의 경우 김종필계를 숙청해놨고, 언론 또한 장악한 지 오래였습니다.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는 학생운동인데, 71년에 학원병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해 위수령을 발동해 1,889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학생운동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유신 이후에도 민우지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함성지 사건 등을 통해 학생들을 또 다시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반유신 투쟁 등은 박정희 정권에 큰 타격을 줍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악랄함을 국제사회에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서울대의 투쟁은 전 대학으로 퍼져나가 동맹휴학, 시험 거부 등의 투쟁을 일으킵니다. 박정희정권은 학생투쟁에 대해 문리대에서만 180명을 연행하고 20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경 처벌로 나섰지만, 12월에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고 모든 처벌을 백지화하는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반유신투쟁은 학원가를 넘어서게 되었고, 장준하 등 각계인사 30명이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시작합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지만 반유신투쟁이 멈추지 않자 결국 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합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형을 내리겠다는 협박이였습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을 통해 첫번째로 구속된 장준하씨를 시작으로 23명이 1호를 통해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긴급조치1호 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는데,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면 죽일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였습니다.
민청학련과 이것에 관련한 제 단체의 조직에 가입하거나, 그 활동을 찬동,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에게 장소, 물건, 금품 그 외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그 활동에 관한 문서, 도서, 음반, 그 외의 표현물을 출판, 제작, 소지, 배포, 전시, 판매하는 것을 일제히 금지한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 긴급조치 4호 中
71년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독재 정권으로서는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대선의 승리 또한 장담할 수 없었으며, 자칫하다간 독재정권이 붕괴될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사건이 세계적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대통령도 법과 여론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는 교훈을 주게 됩니다. 결국 박정희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주동자들을 엄벌에 처할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관계로 1,024명을 조사했고, 그중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겠다고 했으며, 최종적으로 지도자급 32명을 법적으로 심판합니다. 32명이 받은 형량은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천문학적인 형량이였습니다. 심지어 민청학련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에게 변론 내용을 이유로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변론 내용을 문제삼아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변호권의 침해였으며, 변호인은 재판에 관한 직무상의 행위로 인해 어떤 처분도 받지 않는다는 군법회의법 28조의 명문에도 위배되는 처사였습니다. 변호사마저 징역형을 받는 모습은 이 재판의 본질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청학련사건 관계자들은 국내외로부터 많은 연대적인 동정을 받았는데, 대부분 젊은 학생이었고, 종교의 배경이 있었으며, 배후 조종자가 전직 대통령이거나 대학교수, 교직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박정희정권은 이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민청학련사건 관계자는 사형을 피해 갔습니다. 하지만 인혁당이라고 분류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학생이나 대학교수, 성직자 등의 다른 관련자들과 달리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동정적인 여론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이데올로기인 반공을 내세워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정부 발표에 사람들은 별 의심을 품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천명이 넘는 민청학련 관련 혐의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처형당한 그룹이 되고 맙니다. 이들은 가족들 외엔 몇몇 외국인 성직자, 그리고 가톨릭계로부터 약간의 동정을 받았을 뿐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박정희와 만나서 인혁당이라는 누명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탄원하려 하였으나, 청와대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중개자를 통해 박정희는 인혁당 피고들뿐 아니라 자기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러 "그들을 바짝 움츠리게 해야 한다"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답하였고, 그 다음날에 사형판결을 받은 전원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인혁당 사건은 그 가족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인혁당의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속에 언제나 감시당해야 했고, 직장을 구할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인혁당의 아들을 동네 꼬마들이 끌어내어, 목에 새끼줄을 매어 나무에 묶어 놓고 폭행하는 놀이는 했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관계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 친지들, 더 나아가 대한민국 역사에 난도질을 한 이 사건은 그야말로 독재정권이 낳은 씻을 수 없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2007년에 나온 법원 판결에서 인혁당 사건은 강압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음이 인정되어 무죄임을 공식적으로 밝혀졌지만, 박근혜 대선후보, 박범진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인혁당 관련 논쟁을 일으키는 등 무고한 희생자들이 짓밟힌 명예를 완전히 되찾을 날은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