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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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신을 프랑스어로 저항이라는 뜻을 가진 레지스탕스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7년에 출생한 저자 스테판 에셀도 이러한 저항가 중 한명이였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불의에 저항해 왔습니다. 나치즘에 저항했고, 심지어는 레지스탕스들의 모국인 프랑스의 큰 잘못이였던 알제리 지배에 대해서도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동기는 분노였습니다. 이들의 분노는 프랑스의 토대가 되었고,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들은 모든 시민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원했고, 공동체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을 국영화하는것을 원했습니다. 경제계나 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는 경제적 민주주의 정립을 원했고, 국가나 금권, 외세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원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레지스탕스들은 이런 원칙과 가치를 위해 저항했고,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산들은 계속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는 계속적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소수의 경제계 인사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해 나가고 있고, 기업의 지배를 받는 언론이 늘어나고 있으며, 교육의 장에서까지 차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가치를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에셀은 권고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분노하라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에셀의 시대보다 분노해야 할 것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분노해야 할것은 점점 늘어나지만 뚜렷한 성과를 느끼기는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분노하지 않습니다. 에셀은 분노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분노만 하는데서 그친다면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에셀은 분노한 뒤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라고 말합니다. 나치의 침공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들어가 총을 집었듯이, 현대사회의 불의에 맞서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 세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선 과거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명확한 형태의 불의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관심을 가진다면 과거처럼 충분히 분노할 만한 불의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 제재로 인한 이라크인 사망자 수는 역사를 통틀어 소위 대량 살상 무기들이 초래한 사망자 수를 능가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p.299 

그러나 에셀은 이런 불의에 대해 과거처럼 총을 들며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이며, 비폭력이라는 길을 통해 인류는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때론 극심한 절망과 분노가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며,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 불의에 저항할 때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불의에 저항할 때, 비폭력의 수단을 사용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고 중요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본적인 경험에 반하는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전통이나 관습 또는 권위자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충분히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을 요구하는 확실성이 우리가 경험한 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기표현은 그 뿌리에서부터 방해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자유의 조건은 늘 권력이 강요하는 규범을 광범위하고 일관되게 회의하는 것이다. - 《권위에 대한 복종》p.268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심리학 실험을 통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맹목적이거나, 관습에 순응하는 뿌리 깊은 습관에 따르며, 어떤 사회, 어느 곳에서나 권위에 대한 복종이 너무도 쉽게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권위자의 명령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다 하더라도 그에 저항하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심리적으로 금방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복종의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그런 편한 길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손을 잡는것과 같이 사람간의 접촉성이 높아지면 권위에 저항할 확률이 늘어난다는 것 또한 인상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의에 저항하는 고된 길을 걷고자 한다면 해야 할 일은 명료합니다. 다함께 손을 잡고, 고된 길을 걷게 해주는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는 바로 분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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