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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사 - 대한민국 의료 상업화 보고서
김기태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평점 :
미국에서 흑인이 노골적으로 차별받던 시절에, 한권의 책이 발간됩니다. 존 하워드 그리핀이 쓴《블랙 라이크 미》는 대중들에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흑인차별의 실체를 보여 줬습니다. 백인이였던 그리핀은 '가짜 흑인'으로 분장함으로써 흑인차별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흑인이란 종이 열등해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말해 줬습니다. 상업화되어가는 대한민국 의료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병원장사》도《블랙 라이크 미》와 같은 접근방식을 사용합니다. 저자 김기태 스스로 '가짜 환자'가 되어 의사들의 반응을 살펴본 것입니다. 동일한 증상에 대한 의사들의 판단에 차이가 있을까? 그런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결과는 명확합니다. 의료계는 이미 많이 상업화되어 있었습니다.
가짜 환자가 먼저 찾아간 곳은 척추병원이였습니다. 환자의 증상에 민간병원과 공공병원은 과연 같은 판단을 내렸을까요? 결과는 달랐습니다. 민간병원이 공공병원에 비해 MRI와 같은 고가의 치료방식을 환자에게 더 적극적으로 권고했고, 수술로 해결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MRI비용도 민간병원이 공공병원보다 더 비쌌으며, 민간병원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불법 시술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의대생들이 보는 책인《필수정형외과학》에 디스크로 알려진 추간판탈출증 치료법이 소개되는데, 이 증상은 2주에서 4주 내에 90%는 자연치유된다고 나옵니다. 의사들이 학생시절에 배우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민간병원이 권고하는 것처럼 MRI를 찍어보고 수술을 할 만한 증상은 아니였던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과잉진료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짜 환자 실험은 항문외과, 치과에서도 실시되었습니다. 결과는 모두 척추병원과 같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시장에서 공급자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면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나아진다. 그런데 의료 시장에서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보는《보건경제학》을 펼치면,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의료는 전문적이기 때문에, 소비자인 환자가 의료의 양을 결정하기 힘들다. 의사가 의료 서비스 공급량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이유다. 따라서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말이 더 맞다. 보건의료는 도덕적 해이가 수요자뿐 아니라 공급자에 의해서도 발생하는 특이한 분야다. - p.127
민간병원의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더 비싼 치료법을 권고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효과가 검증된 표준 방식의 치료를 하면 수익이 적을 뿐더러, 때론 적자가 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제적 인센티브는 의사들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의학분야에서도 소위 잘나가는 분야와 기피하는 분야를 만들어냈습니다. 잘 나가는 분야의 기준은 돈을 잘 벌수 있느냐입니다. 암센터는 돈이 되기 때문에 병원마다 서로 투자하고 있지만, 중증외상센터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습니다. 중증외상센터에서 치료할 수 있는 증상은 한국인의 사망원인 중 3위에 해당하는 증상입니다.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중증외상센터가 부족해서 죽은 한국인은 매년 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총상을 당한 석해균 선장도 소위 빅5라 자랑하는 병원이 아닌, 아주대병원의 중증외상센터에서 치료했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 외상센터사업은 비용에 견줘 효과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용편익 비율이 0.31~0.45에 불과하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쉽게 말해, 돈이 안 되니 중증외상센터를 짓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획재정부의 자료를 보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생존했을 때 사회가 얻는 이득을 1억 5511만 원으로 계산했다. - p.198
현재 의료영리법인이 추진중에 있습니다. 의료영리법인이 허용되면, 병원은 투자와 배당이 가능한 사업모델이 됩니다. 현재도 병원경영지원회사(MSO)를 통해 자본의 병원 소유가 가능합니다. 병원이 사업모델이 되면, 시장논리에 따라 장사를 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시장에 소위 빅5라 불리우는 병원들의 의료계 군비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의 재벌병원이 규모 경쟁에 가장 적극적입니다. 외국의 경우 보험, 의대, 병원, 의료기기, 바이오제약, 헬스케어 등의 사업을 벌이는 의산복합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삼성이 독보적입니다. 경제법칙은 의료계도 예외는 아니여서, 병원들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납니다. 큰 병원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동네의 작은 병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구 7만이 넘는 강원도 삼척시엔 소아과 병상이 없습니다.
상업화는 의료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넓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외상외과는 돈이 안되기 때문에, 근무할 의사도, 병원이 투자할 이유도 없습니다. 산부인과는 2011년 한해에 50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전국 230여 곳의 기초 시,군,구 가운데 분만실을 갖춘 산부인과가 없는 곳은 54곳입니다. 공공의료가 이런 부족한 분야를 지탱하는것도 한계에 달했습니다. 의사나 간호사가 적으니 일이 고되고, 일이 고되니 의사나 간호사들이 더 오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수익도 나지 않다 보니 의회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입니다. 공공의료에서도 환자의 건강보단, 돈이 되는 치료법에 대한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강검진 열풍입니다. 건강검진보다 생활 습관 치료가 환자에게 더 부담이 적고 효과적이지만, 건강검진이 더 돈이 됩니다. 당연히 의사들이 과도한 건강검진을 권고하게 합니다.
의료의 상업화는 특정 분야로의 편중, 특정 지역의 밀집, 특정 계층 선호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영리병원 도입을 찬성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정부와 일부 경제연구소는 영리병원이 더 나은 서비스와 향상된 질을 가져다 줄 것이며, 나라경제가 살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국 텍사스대학의 로스나오 교수는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의 성과를 비교 분석한 결과 서비스의 질, 비용 대비 편익, 접근성 등 모든 부분에서 비영리병원이 우위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타일러 코언과 커틀러 교수는 영리병원의 도입으로 국민의 건강이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으며, 업자들의 배만 불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형병원을 평가한 자료에서도 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대형 병원과 일반 병원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비싼 진료비가 꼭 좋은 의료 서비스와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2005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처음 도입한 이래, 로봇 수술은 마법의 시술인 양 주목받았다. 새 기계가 없는 병원은 구식 취급을 받았다. 고가의 기기는 짭짤한 벌이도 보장해 줬다. 일반 수술의 6~10배 가격이었다. 병원에서는 기계의 원가를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환자들을 로봇 수술로 유인했다. 부글거리던 거품은 2010년 12월에 터졌다. 양승철 연세대 교수가 나섰다. 논란이 뜨거워지자 2011년 6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로봇 수술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내놓았다. 연구원은 국내외 연구를 분석한 결과, 다빈치 로봇 수술이 장기생존율이나 재발률, 합병증 발생률 등에서 일반 개복 수술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 pp.129~130
의료 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정보 비대칭 영역이기 때문에, 돈독이 오른 병원과 의사 탓으로만 돌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상업화를 추구하는 의사들의 행보를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다수의 양심적인 의사들이 윤리적인 의료행위를 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를 포함해 이러한 의료 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권고안은 여럿 있었습니다. OECD의 한국 의료 보고서에서도 환자의 건강이 중심이 되는 의료체계를 위해선 지역 중심의 1차 의료기관의 강화, 포괄수가제 도입, 병원과 의사들의 성과 및 과실 자료 공개, 응급서비스 강화, 민간의료보험보단 국민건강보험 중심의 재정정책 등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가짜 환자 실험으로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의료의 자화상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산을 앞둔 산모가 병원을 찾아 떠돌아다니고, 신생아가 치료실이 없어서 죽어가는 현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변화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