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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백영서 외 옮김 / 창비 / 2013년 5월
평점 :
우리사회엔 있으면 좋지만, 최대한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발전소나 쓰레기 매립장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미군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의 주둔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단점이 있기 때문에 미군캠프는 자국에 존재한다는 조건 하에 최대한 멀리 두고 싶은 시설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미군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선택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가 지적하듯이, 주일미군 문제는 미군과 일본정부가 합심해 만든 '구조적 오키나와 차별'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미군 주둔문제와 관련된 구조적 오키나와 차별구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키나와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기 때문에 미군은 많은 피를 흘리며 점령했고, 전후에도 오키나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전쟁후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했을때에도 오키나와는 계속해서 미군정 아래에 있게 됬습니다. 일본이 대미종속적 안보체제를 유지하긴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미군기지의 건설이나 운용이 일본법과 여론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오키나와는 미군이 곧 법이였기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은 완전한 무권리 상태에 놓이게 됬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은 미국이 오키나와를 실효지배했으나 베트남전쟁당시 일어난 반전운동 등으로 인해 미국의 배타적 오키나와 지배는 불가능해졌고, 결국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반환되었습니다. 주일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미군기지 근처에선 미군범죄가 빈발했는데, 군마현에서 미군병사가 농촌부녀를 사살한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반미, 반기지 감정이 증가하자 미일관계의 안정을 위해 주일미군부대를 이주시킬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일부는 한국으로 이주했는데, 문제는 주일미군의 대다수는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였습니다.
결국 일본본토의 미군기지는 극적으로 감소한 반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극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전체 주일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정부와 국민이 오키나와에 주일미군기지의 압도적 다수를 떠맡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일미군이 가진 장점은 일본국민 모두가 향유하게 된 반면, 주일미군의 단점은 일본국민의 0.6퍼센트를 차지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전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적 차별은 미국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가, 일본정부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수십년에 걸친 사고정지(思考停止)상태 속에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존재에 대한 당연시야말로 구조적 오키나와 차별이라고 말합니다.
1995년 9월 4일 오키나와 주둔 미군병사 3명이 12세의 여자 초등학생을 납치해 집단강간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많은 미군범죄가 발생하고 있었고, 일본정부가 오키나와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을 제정해 토지소유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미군용지로 사용하게 하는 등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초등학생 집단강간 사건이 발생하자 오키나와에서 미일지위협정 재검토와 미군기지의 축소, 철폐를 요구하는 주민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왕조가 일본에 통합되면서 류큐인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고, 일본 가게에 '조선인과 류큐인 사절'과 같은 팻말이 붙을 정도로 차별이 심했던 터라 오키나와의 주민운동은 독립운동적 성격을 가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 시정권의 반환이 이루어져 오키나와 문제는 영토문제의 중심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오키나와가 본토로 복귀했다고 미군이 점령한 오키나와의 해방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까? 후텐마의 해병대 비행장 반환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패전 후 65년 동안 계속된 미군 기지로부터 오키나와의 해방이 지금 문제의 핵심이다. 이 말은, 동북아시아 최대의 영토문제는 여전히 오키나와 문제라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p.268
일본정부와 언론은 계속적으로 주일미군의 필요성을 홍보합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재해에서도 당시 일본 언론은 주일미군의 재해구조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반면, 중국이나 북한 등이 제시해온 평화적 제스처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미군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필연적으로 오키나와 주둔이라는 문제를 희석시킵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는 이런 미국과 일본정부가 합심해서 만든 구조적 오키나와 차별구조가 지금껏 이익을 위해서 약자들에게 비용을 전가시켜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오키나와의 차별투쟁은 일본사회에 경제성장 우선, 효율 우선의 사회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