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
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 현실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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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포스트모던에서의 문학에 대해, 그 중에서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타쿠 붐의 중심인 라이트노벨을 통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전작에서 묘사하듯이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쌓여 있고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바뀌어가는 이른바 동물화적인 부분을 사회와 문화가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트모던의 소비자가 그럼에도 인간적, 즉 주어진대로의 환경을 거부하고 비평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독해, 비평적 관점을 라이트노벨을 위시한 최근의 오타쿠 문화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분석도구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서브컬처에 대한 분석은 단순히 오타쿠 작품의 분석, 독해에서 벗어나 더 큰 차원에서의 실존적인 문제에도 쓰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작에서 언급했듯이 포스트모던은 큰 이야기의 쇠퇴로 특정지어집니다. 이것은 18세기부터 시작된 근대사회에서의 규범의식이나 전통의 공유와 같은 큰 이야기가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다문화주의적, 다원화라는 특징에 따라 거의 대중 모두가 공유하던, 설령 공유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공유해야 했던 큰 이야기라는 개념이 쇠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특징은 라이트노벨에도 이어집니다. 라이트노벨은 케릭터가 이야기를 일탈해버리거나 하나의 케릭터에서 여러 이야기가 생성된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소설 형식입니다. 이런 형식은 기존의 일반적인 소설과 차별됨을 보여줍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소설《동백꽃》의 점순이가《운수좋은날》의 김첨지를 만난다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이트노벨의 케릭터들은 데이터베이스를 환경으로 하여 만들어져 있어서 케릭터의 자율화, 이차창작 등이 가능합니다. 기존 소설과 다르게 일러스트 등을 통해 공식적인 형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공유화적인 부분을 가능케 합니다.

이런 라이트노벨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먼저 오쓰카 에이지의 평론을 예로 듭니다. 오쓰카 에이지에 따르면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라고 하는 세계속에 존재하는 허구를 사생한다고 정의하며 라이트노벨은 기존의 순수문학과 다른 논리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기존의 순수 문학(라이트노벨을 제외한 모든 소설)을 그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는데, 자연주의적 문학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현실을 사생하며 일반적으로 소설의 내용이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받아들여집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인《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예로 들면 이 소설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한국 빈민층의 현실과 동시에 받아들여집니다. 소설에서 폭력을 묘사한다면 소년 범죄의 시대로, 인터넷이나 게임이 등장한다면 사회의 가상 현실화를 읽어내는 것이 자연주의적 문학의 독해방식 입니다.

그에 반해 라이트노벨은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정의는 데즈카 오사무가 한 발언에서 시작된 만화기호설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은 만화 표현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기호를 넘어서 신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만약 만화 표현이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를 들면 만화에서 여자의 가슴을 그리는 것은 실제 포르노에서 여자의 가슴을 노출시키는것과는 다른 것임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화는 실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때에 따라서는 규제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화기호설에 대해 오쓰카 에이지는 만화표현은 기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논의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기호이면서 동시에 신체를 그린다는 모순성을 의미합니다.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불투명하고 비현실적인 표현을 쓰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해 투명하고자 하는 굴절된 모습을 지닙니다. 이 반투명한 언어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투명한 현실묘사와 불투명한 신화나 민담 사이에 존재합니다. 1990년대 들어 롤플레잉 게임은 케릭터 소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게임 기법에 기초한 소설에 대해서는 혹평을 합니다. 영화, 만화, 미스테리 등은 기호적인 수단밖에 없다는 한계를 자각한 후에 현실과 관계를 모색하는데 반해 게임적 특징을 출발점으로 하는 문학은 현실에서 벗어난 단순 소비재이며 문학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은 혹평은 게임적이란 본질적으로 리셋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셋이 있는 한 죽음은 아무 의미를 지닐 수 없고 때문에 문학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에서 오쓰카 에이지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포스트모던에서 등장하는 케릭터는 모두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이던, 만화던, 게임이던 간에 케릭터는 모두 메타 이야기적인 존재, 즉 게임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오쓰카 에이지의 소설론에서 케릭터의 도입에 실현되는 문학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 문학적 성격인 메타 이야기성, 다시 말해 게임성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오쓰카 에이지가 라이트노벨을 기존 문학사와 차별화함으로서 논의의 장을 열었다는 점은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게임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고 평합니다. 그렇다면 게임적, 다시 말해 메타 이야기적인 조건 하에서 문학적인 가능성은 없을까? 저자는 이런 메타 이야기성이 또 하나의 리얼리즘을 가능케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게임적 리얼리즘인데, 하나의 시작과 결말을 지닌 소설과 케릭터 소설이 케릭터 소설로 존재하는 한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메타 이야기적인 상상력을 결합해 생겨나는 리얼리즘입니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포스트모던이 확산시킨 이야기 소비와 그 확산이 만들어낸 구조의 메타 이야기성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적 리얼리즘은 어떤 문학적 과제를 지니는가?

문학평론의 주류는 자연주의적 독해입니다. 자연주의적 독해는 이야기와 현실을 대응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독해는 케릭터 소설이 쓰이고 읽히는 환경에서는 잘못된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케릭터 소설은 케릭터의 설계가 요소화되어 이야기가 메타 이야기적 상상력 속에서 반 용해된 포스트모던 시장을 전제로 제작됩니다. 때문에 케릭터 소설의 대부분이 판에 박힌 이야기를 판에 박힌 케릭터를 사용해서 말할 수밖에 없고 그 주제도 판에 박힌 것에 그칩니다. 현재의 케릭터 소설은 평범하게 읽고 평범하게 주제를 찾는 한, 모티프나 장치의 특수한 진화를 제외한다면 그다지 다양한 표현방식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런 작품을 독해함에 있어서 환경 분석적 독해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환경 분석적 독해는 이야기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고 어떤 형태로 유통된다는, 작품 외적인 사실 자체가 다른 주제를 작품 안에 불러들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관점을 도입함으로서 자연주의적으로는 단순히 판타지에 취급되는 황당무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케릭터 소설 속에서 작품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고려하고 작가가 그 작품을 그렇게 쓰고 이야기하게 만든 무의식의 역학을 분석함으로서 겉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읽어내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환경 분석적 독해를 통해서 기존에 나온 소설과 게임을 거론하며 게임적 리얼리즘의 특징을 제시합니다.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소설《올 유 니드 이즈 킬》에서는 오쓰카 에이지가 게임기법에 사용된 리셋개념에서는 죽음을 묘사할 수 없다고 한 데 반해 이 소설에서는 죽음의 일회성을 오히려 강조함으로서 죽음의 중요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 외에 미소녀게임의 경우에도 텍스트를 읽는 것 외에는 다른 특징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소설적 분석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 나온 미소녀게임『원』은 영원의 세계라는 설정을 통해 한 사람이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것과 모든 여주인공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는 미소녀게임에 내재된 메타 이야기의 모순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미소녀게임『에버17』의 경우는 플레이어의 메타 이야기적 위치를 시점 트릭을 이용해 강조했고,『쓰르라미 울 적에』의 경우 메타 이야기적인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존재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구성 등 게임적 리얼리즘이 미소녀게임으로 표현된 부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 구조적 주제는『시간을 달리는 소녀』,『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블루 스카이』,『카논』,『에어』,『마브러브』,『크로스채널』 등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임적 리얼리즘과 라이트노벨에 대한 문학비평론의 분석도구는 단지 서브컬처내에서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예로 비록 순수문학과 비교하면 훨씬 서브컬처스럽기는 하지만 순수문학의 영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츠쿠모주쿠》를 말합니다. 순수문학 역시 게임적인 감각, 메타 이야기적인 구성과 상상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게임적 메타 이야기적 상상력이 넘쳐나는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 특정한 이야기를 고르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삶의 문제, 포스트모던에서 다원화되고 해리적이 된 삶 속에서 실존적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과 연관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독해가 성립한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학, 즉 라이트노벨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경계를 넘어 전통적인 문학과는 다른 우화적이고 환상적이고 메타 이야기적인 실존 문학의 계보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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