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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크 롤랜즈는 어려서부터 크레이트 데인처럼 큰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개가 몹시도 그리웠는데, 첫 직장인 조교수 2년째 무렵 신문광고에서 발견한 '새끼 늑대 판매'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습니다. 이 귀엽고도 파괴적인 존재 '브레닌'은 마크 롤랜즈와 함께 11년을 살았고, 롤랜즈와 언제나 붙어 지냈습니다. 롤랜즈가 럭비를 할때도,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할때도, 여행을 다닐때도, 레스토랑에 갈때도 함께였습니다. 브레닌은 젊은 철학자에게 있어서 동생이자 형이였으며,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는 늑대 브레닌과의 따뜻한 일화와 진중한 철학이 번갈아 나옵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지극히 자연스러운데, 브레닌에서 철학이 시작되고, 철학에서 브레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늑대인 브레닌이 영장류인 마크 롤랜즈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서, 늑대가 자연에서 살지 않고 사람과 사는 것이 늑대로서 자연스러운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것은 본질과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것은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나 하이데거로 연결됩니다. 둘 다 사회적 집단을 구성하는 늑대와 영장류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영장류인 우리는 늑대와 다르게 근거, 증거, 정당화, 보장과 같은 개념이 필요하며, 불만이 많을수록 정의가 필요하고 도덕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차이점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률로 연결됩니다. 브레닌과 마크 롤랜즈가 산책을 하는 시간을 정하거나 놀이방법을 정하는 모습에서 사회계약의 모습이 떠오른다면, 문명을 대표하는 영장류와 자연을 대표하는 늑대 중 어느 쪽이 더 야만적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사회계약의 이면을 볼 수도 있습니다.
침팬지 집단을 연구한 『침팬지 폴리틱스』에서 프란스 드 발이 지적하듯이, 영장류는 다른 사회적 동물이 걷지 않았던 이중성과 음모로 포장된 길을 걸어왔고, 영장류는 늑대가 결코 꿈도 꾸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할 무자비한 방식으로 동료를 대하며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인간의 우월성과 이성의 유일성이라는 관념의 틀을 가져 왔는데, 인간은 계약을 할수 있기 때문에 문명상태가 되었고, 시간의 개념 속에서 삶의 의미를 좇을 수 있기 때문에 우월하며 자유의지를 지닌 유일한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지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 가치있다는 류의 만물의 영장설은 칸트,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들을 토대로 현대사회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며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브레닌은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대답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라고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이외의 존재는 자유롭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브레닌이 보여주듯이 선호하는 음식인 치즈를 달라고 요구하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싶은 것을 하는 모습은 과연 동물들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언어로 대화하고 글을 쓰는 등의 특징이 우월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브레닌이 달리는 모습 또한 우월함의 표현일 것입니다. 영원토록 행복을 추구하며 집착하기까지 하는 인간에 비해 순간을 살아가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브레닌의 사냥 모습, 자연의 모습은 삶이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장류적 영혼의 유산이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면, 늑대는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정도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인간의 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자들을 대할 때 순수와 자유로움 그 자체로 나타난다. 가장 극단적이고 너무나 심오하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정한 인간성의 도덕적 시험은 힘없는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다른 모든 이들이 무감하게 따라하게 되는 인간의 근본적인 직무유기가 여기에 존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브레닌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 다른 존재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속에 숨은 이면,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자체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특징은 감정을 숭배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며, 어떤 감정을 좇다 못해 좇기고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늑대는 감정이 아닌 실체를 좇습니다. 결국 늑대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혹은 잃어버린 모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늑대보다 영장류에 더 가까우며,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늑대의 모습이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늑대를 멸종시킨 대가는 결국 우리가 치러야 합니다. 젊은 철학자와 자유롭게 살다 간 늑대 브레닌은 우리들에게 하여금 가끔은 수다쟁이 영장류의 속삭임 대신 내면에 있는 과묵한 늑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