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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우리가 사용되고 있는 문자인 한글은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5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한글은 왠만한 테크놀로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였습니다. 한글은 모든 것이 한자와 한문으로 이해되던 당시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지식의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저자 노마 히데키는 문자학 및 언어학 이론을 바탕으로 지식으로서의 한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일은, 하나의 문자체계를 뛰어넘어 언어, 발음, 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세계엔 수천개의 언어가 있지만, 문자로 쓰여지고, 또 표기법과 정서법을 갖춘 문자체계가 구축되어 쓰여진 언어로서 실현되는 혜택을 받은 언어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는 언어음에 따라 말해진 언어가 먼저 실현되고, 문자에 의해 쓰여진 언어는 나중에 생겨나게 됩니다. 언어(한국어)와 문자(한글)은 다른 평면에 존재합니다. 'apple'을 '애플'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문자인 한글로 다른 언어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의 한반도는 언어(한국어)와 문자(한자)이 사용되는 곳이었습니다.
문자는 언제나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자는 형태-발음-의미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증식 장치로서의 한자는 발음-의미 와 형태-의미 의 변용으로 증식한 반면, 형태-발음 은 변용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 일본 등 다른 한자언어권에서 형태-발음 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 한문훈독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용해서 사용한들 그 기반이 한자에 있는 한 한계는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천년에 걸쳐 사용해온 한자, 형태-발음-의미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고자 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문자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기존의 낡은 플랫폼을 버리고, 더 효율적인 플랫폼을 만드는 일입니다.
저자는 한글의 탄생을 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문자의 변화과정의 틀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북방 셈족에서 시작된 알파벳은 서쪽으론 그리스, 라틴문자에 영향을 주었고, 동쪽으론 아랍, 인도, 몽골, 만주문자 등에도 그 유전자가 담겨 있습니다. 문자는 서로 자극하며 동화됩니다. 아랍문자 등이 지닌 자음자모 구조의 유전자는 한글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랍문자 등과 같은 단음문자들은 자음자모는 견고한 형태를 가지는 반면 모음은 형태가 불분명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천년 이상 변화해 온 알파벳 시스템에서 부족했던 모음자모를 선명한 형태로 충족시킴으로서 가장 진보된 문자가 된 것입니다.
정음학은 문자의 평면에서 각각의 요소에 형태를 준다. 음운론적인 개념은 경우에 따라서는 애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태는 그러한 애매함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다. 초성+중성+종성, 즉 자음+모음+자음 각각에 뚜렷한 형태를 준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자를 만든다'는 문자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15세기 정음학이 도달해 있었던 결정적인 높이이다. 이것은 사실상 현대 언어학의 수준이다. - p.154
지중해권의 문자들이 모음자모와 자음자모를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시스템이었고, 아랍문자와 그 동쪽지역의 문자는 3차원적인 평면성을 획득하려 했으나 모음과 자음이 독립성과 단위성이 희박했던 반면, 훈민정음은 정음은 동적이고 입체적 배치 시스템을 지닌 전면적 단음문자 시스템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발음적인 측면에서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에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일본어 같은 음절문자는 음절의 경계는 볼 수 있지만, 음절의 내부 구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로마자처럼 단선적으로 직렬을 이루는 단음문자는, 단음과 그 배열은 알 수 있지만 음절의 경계나 내부 구조는 형태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음절의 안과 밖, 음절의 내부 구조와 외부 경계를 모두 보여줍니다. 정음은 음의 높낮이까지 형태화하고자 했습니다. 훈민정음을 제외한 다른 언어들은 문자와 발음의 관계가 자의적입니다.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형상화한다는 사상으로 만들어져 실제로 이만큼의 규모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문자는, 역사상 훈민정음 뿐이라고 말합니다.
훈민정음은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 그리고 악센트라는 네 가지 요소로 해석하고 각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사분법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15세기 정음학의 이러한 인식은 15세기 중국 음운학의 이분법을 훨씬 능가한 것은 물론이고 거의 20세기 언어학의 지평에 이른 것이었다. 세종을 비롯한 이들의 사상은 언어음이 의미와 관여되어 있는 한 그것을 극한까지 형태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 p.199
한글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패러다임이었던 한자와 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동설이 등장했을 때처럼 기존의 지식인들에게 한글의 등장은 자신의 존재이유마저 위협하는 대격변이었습니다. 때문에 저자는 정음혁명에 반대하던 한자한문 원리주의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 투쟁에서 한글의 구조는 빛을 발합니다. 한글의 형태는 한자와 동일한 크기를 차지함으로써 한자에서 한글로의 전환에 용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정음의 모양은 붓글씨로 쓰여지기를 거부하면서 활자술을 활용하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지식의 전파속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또한 한자 패러다임에서 이어온 음양오행, 성리학 철학등을 문자에 담음으로써 사회가 새로운 문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말하면 한글은 변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호환성이 우수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훈민정음의 등장은 산수화의 세계에 컴퓨터 그래픽이 출현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조선시대에 최만리 등과 같은 한자한문 원리주의자들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더 쉽고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 패러다임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 한자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현대에도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자는 논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한자는 사람들이 기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훈민정음은 당시 한자한문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세계를 바꿔놓았습니다. 한글은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더 화려하고 풍요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유산을 가꾸고 더욱 변화시키는 것은 한글 사용자의 의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