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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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대한민국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전개된 민주화운동인 6월 항쟁은, 광복 이후 일어난 수없이 많은 민주화 투쟁 중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 혁명,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한 부마민주항쟁, 전두환의 신군부에 항거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은 중요한 역사의 분기점이였습니다. 6월 항쟁 이후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사실상 6월 항쟁은 87년 체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군사독재 시절을 종결지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 서중석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민주화운동 측면에서 바라본 6월 항쟁을 넘어서 전두환 정권 측의 자료도 검토함으로써 아직 이 땅에 살아 숨쉬는 6월 항쟁의 정신을 되짚어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의 발화점은 책상을 탁 치자 갑자기 억 하며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였습니다. 하지만 물이 끓기 위해선 계속 가열을 해야 하듯이,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전에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계기를 계속 만들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유성환의 국시발언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2.7 추도대회, 3.3 평화대행진, 4.13 호헌조치, 5.3 인천사태 등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함정에 몰아넣고 사건을 키워 일망타진하는 수법을 사용했고, 우종원군이나 김성수군 등이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2.12 총선에서 드러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과 유권자 의식이 싹트고 있었고, 잡지『말』에서 언론 보도지침을 폭로하는가 하면, 1986년 전두환 정권에 굴복한 언론사였던 KBS에 대한 시청료 거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체제에서는 숱한 비리와 의문사 사건이 계속 일어났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만은 유독 즉각적인 추모와 항의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특별한 것은, 그간 자행된 사건들과 달리 박종철은 피의자로 끌려간 게 아니라 수배된 학생을 찾아내기 위해서 참고인으로 끌려갔다는 점입니다. 이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권 학생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박종철과 똑같이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된 이런 상황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포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테러리즘적입니다. 한 신문 사설에서 주장한 바대로 박종철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되었고, 이러한 위기감은 즉각적인 반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특수성 덕분에 6월 항쟁의 시작은 기존의 민주화운동과 달리 어머니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6월 항쟁의 초기에는 학생들의 활동이 부진했습니다. 당시의 인식은 민주화운동의 핵심은 학생들이라는 것이였는데, 6월 항쟁 이전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봤을때 이러한 해석은 타당한 것이였습니다. 전두환도 3월 19일에 "학교가 조용하면 우리나라가 다 조용해요"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인식은 보편적이였고, 전두환은 학생들을 탄압하는데 집중합니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소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이 진전된 이유는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정당다운 정당, 시민다운 시민이 없을 때에는 학생운동이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였지만, 이제는 학생에서 시민이 민주화 운동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6월 항쟁에 참여한 사회구성원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대학생, 고등학생, 시민들, 언론인, 공장노동자, 농민, 운수노동자, 넥타이부대, 상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었고,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와 같은 종교인들도 투쟁에 나섰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김승훈 신부가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6월 항쟁의 불길을 더했고,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농성투쟁은 서울 최대 격전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6월 항쟁은 지역적으로도 다양했는데, 6. 10 국민대회의 경우 22개 도시에서 40만명이 참여했고, 6. 18 최루탄 추방의 날은 18개 도시에서 150만명이 참여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계층을 가리지 않고 호헌철폐투쟁, 군부독재타도투쟁 및 직선제 쟁취투쟁을 외친 6월 항쟁은 그 성격적인 면에서 대단한 민주화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두환은 민주화운동에 맞서 금강산댐 위협론, 김일성 사망설 등 다양한 프로파간다를 펼쳤고 1986년에 비상수단으로 친위쿠데타 같은것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전두환은 6월 항쟁에서 군대를 출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군대 투입이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온 광주의 기억이 있었고, 걸핏하면 군대를 출동시킨 박정희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부도 또 다른 광주사태의 우려를 하고 있었으며, 군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 상황이였기 때문에 군 상층부는 출동을 꺼렸습니다. 결국 6월 항쟁에 군이 동원될 경우 군대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전두환은 군대 투입을 포기했습니다.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계속 타오르고 있었고, 전두환과 노태우, 민정당의 미묘한 입장 차이가 이어졌으며, 6.26 평화대행진까지 성공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결국 전두환 정권은 백기를 들고 6.29 선언에 이르게 됩니다.

6.29 선언으로 마무리된 6월 항쟁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뜻깊은 민주화 운동이였습니다. 전국적이였고, 범국민적이였으며,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이였습니다. 투쟁방식도 기존보다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민주사회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재 정권이라는 눈앞에 보이는 명확한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사회운동의 성과를 지목하면서 세계 혁명, 아시아에 대한 속죄, 약자구제 등의 막연한 주제밖에 갖지 못하는 바람에 안정적인 사생활의 보장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본의 사회운동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이런 지적은 6월 항쟁이 만든 87년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인식시켜줍니다. 슬라보예 지젝도 언급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 독재 정권이라는 적은 없어졌습니다.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선명하고 격렬한 대립구도는 이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분노하지 않고, 더 행동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회운동가들은 과거의 민주화운동 세력보다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에 펼쳐질 지난한 과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과거 이룩한 민주화 정신, 6월 항쟁의 뜻을 돌이켜보는 것은 사회정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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