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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장기려
이기환 엮고 지음 / 한걸음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의 슈바이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 의사들의 귀감이자 아프리카의 성자라고도 불리웠던 슈바이처에 비교되는 이 사람은 바로 故 장기려 박사 (1911~1995)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의사로서 평생을 어려운 이와 함께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조합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을 치료하고 전두환이 만나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의사였기 때문에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금전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병원비를 받지 않는 등 평생 검소하게 살다 간 의사였습니다. 저자 이기환은《성산 장기려》를 통해 장기려 박사의 일생을 투박하면서도 정감있게 보여줍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프레드 캐플런이 쓴《마크 트웨인 전기》를 비평하면서 전기 부문의 문학적인 측면을 다스리는 법칙 다섯 가지를 지적한 바 있는데, 그 구분을《성산 장기려》에 접목시켜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친스는 전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전기의 주인공과 아는 사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책을 통해 그를 알게 되는 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합니다.《성산 장기려》는 그러한 부분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인간적인 일화를 읽고 있다보면, 만약 아직 살아계셨다면 한번쯤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합니다.
전기의 여러 요소들을 반드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해서, 흔해빠진 이야기들은 골라내고 주인공을 최고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번쩍번쩍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성산 장기려》는 잘 묘사하고 있는 편입니다. 간 대량 절제수술이라는 의사로서의 업적과 군사독재자가 불러도 개의치 않는 담대함, 이산가족 상봉 당시 제의한 특혜를 거부하는 모습 등은 인간 장기려에서 위인 장기려로의 전환을 가능케 해 줍니다. 전기 작가는 문맥을 통해 주인공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조금 표현이 미흡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커다란 사건에서 일어나는 장기려 박사의 삶을 잘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생애에서 얻은 작은 간증을 하겠다. 나는 의학도가 되려고 지원할 때에 치료비가 없어 의사의 진찰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죽는 환자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그러한 환자를 위하여 의사일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한 책임감이 커질 뿐 그걸 잊은 적이 없었따. 나는 이 처음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 장기려,『부산모임』
히친스는 주인공의 사적인 모습 또한 온갖 특이한 버릇까지도 전부 밝혀주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편지나 회고에 반영된 모습만 제시하거나 전기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만 밝히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성산 장기려》에서 이러한 부분은 좀 아쉬운 편입니다. 또한 전기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며, 주인공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나 틀린 해석에 맞서서 자신이 새로 내놓거나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장기려 박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책에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 힘듭니다.
장기려 박사가 누구보다 독실했던 기독교도였던만큼, 책에선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회를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라, 종교인이라면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라 등 기본적인 자세를 고집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였던 장기려 박사의 삶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라도 장기려 박사의 인생사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다시금 재조명해 본다는 사실은, 장기려 박사의 이타적이고 검소한 삶의 방식이 현대사회에서 대단한 어리석음으로 비춰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애써 잊고자 했던 이타성, 협동, 사랑이라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는 걸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