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질병 구제역
아비가일 우즈 지음, 강병철 옮김 / 삶과지식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0년부터 2011년에 한국에서 발생한 구제역 파동으로 300만마리가 넘는 가축들이 도살되었습니다. 구제역은 가축의 식욕과 젖 생산량이 감소하며, 단기간 앓고 회복됩니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열에 의해 쉽게 파괴됩니다. 과연 구제역이란 무엇이길래 그토록 강한 대처를 했던 것일까요. 구제역이란 병 자체만으로 보면 굳이 도살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것은 당연합니다. 저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구제역 도살정책이 구제역이란 자연적 질병 그 자체를 생물학적 견지에서 바라보는 정책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만들어진 정책임을 지적합니다.

구제역이 대수롭지 않은 질병에서 외래 전염병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를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었던 것 같다. 흔히 질병 통제 조치는 그 임상 증상과 전파 경로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마련된다. 지식이 먼저고 행동은 나중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구제역의 경우, 이 과정이 반대였다. 1869~1884년에 걸쳐 시행된 구제역 통제법의 형식과 방법은 질병에 대한 대중의 경험과 인식에 예상외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구제역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져 마침내 우역에 버금갈 정도로 전염성이 강하고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큰 최악의 가축 전염병으로 인식되었다. 구제역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전염병으로서의 구제역은 본질상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계몽된 사람들에게 '발견'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였으며, 통제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구제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힘을 얻어감에 따라 본래의 사회적 기원은 점차 가려져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연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 p.37

19세기까지만 해도 구제역은 매우 흔하고, 별 걱정없는 가축 돌림병이였습니다. 1848년의 목축업자 홀 키리가 쓴 글에 따르면 구제역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홍역이나 백일해, 감기처럼 일상적인 질병이 되어 모든 소가 한번은 앓고 지나가는 병으로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농부들이 이익률이나 생산성 등에 덜 민감했을 뿐더러 혼합 영농 시스템의 일환으로 가축을 길렀기 때문에 문제거리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한달도 되지 않아 다시 회복되는 병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요인들로 인해 구제역은 점차 심각한 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당시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가축 소유주들, 상류층 육종가들과 토리당 의원들은 구제역이 박멸되기를 원했고, 영농환경이 점차 대규모화되고 날씨의 영향으로 불황이 시작되자 경작을 통해 축산에서 생기는 손실을 벌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로 인해 구제역으로 인한 식육과 우유 생산 감소가 주목받으며 경제적 중요성으로 부각됩니다.

상류계층이 기르던 가축들은 도살하지 않고 격리시킨 후 자연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공식적으로는 영국 농업 전반의 이익을 표방한 도살 정책은 사실상 해외로 수출되어 큰돈을 벌어다 줄 자신들의 가축이 구제역에 걸리지 않도록 '일반' 가축의 신속한 도살을 지지하는 상류계층 육종가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셈이였다. - p.65

이러한 도살 정책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반발을 가져옵니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가축이 도살당하는 농부들부터, 지방 당국 등에서는 도살이 아닌 격리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없던 시설이라 구제역 도살 정책으로 가축을 전부 잃어버린 농부들은 그자리에서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빈민으로 전락하다 보니 그 저항은 더욱 격렬했습니다. 당시 구제역에 대한 심의회가 시작되자 200~300명의 성난 농부들이 회의장에 들이닥치기도 했습니다.

농수산부의 조치가 지연되는 바람에 64명의 농부들이 진단 후 14일이 넘도록 도살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증상을 경감시키기 위해 수의사의 권고를 따랐다. 가축의 발을 깨끗이 씻긴 후 소독하고, 영양가 있는 사료를 먹이자 며칠 후 대부분의 가축이 회복되는 것을 본 농부들은 깜짝 놀랐다. 도살을 면한 몇몇 순종 가축 소유주들 역시 비슷한 보고를 했고 나이 많은 농부와 수의사들은 1870~1880년대에 가축들이 쉽게 구제역에서 회복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러한 보고는 구제역이 스토크만이 주장한 것처럼 끔찍하고 파괴적인 유행병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했고 도살 정책에 대한 더욱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 p.73

구제역에 대한 도살정책은 영국의 지리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았는데, 유럽 본토 등에서는 잦은 가축이동이 가능해 도살정책이 사실상 의미가 없고 백신정책으로 방향을 돌린 반면, 섬나라인 영국은 도살정책으로도 구제역을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제역을 막기 위해선 수입제재를 할수 있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정치적으로 큰 무기가 됩니다. 당시 영국에 식육용 가축을 수출하던 아일랜드, 아르헨티나와의 관계에서 이 구제역은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구제역으로 인해 아일랜드의 자치에 먹구름이 끼었고, 아르헨티나와의 관계에서 무역보복이 생겨나는 등의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농수산부가 백신 정책을 거부했던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내부 토론 내용을 보면 정책 결정의 이면에 자리잡은 깊은 도덕적, 문화적, 국가주의적 신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은 도살을 질병 통제 방법으로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원칙적, 교육적 원동력 및 백신 접종국에 대한 영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기억 속에 생생한 시대에 개인의 이익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순종적이고 강인한 국민이 지닌 미덕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였다. 도살정책 옹호자들에게 도살정책을 채택한 국가들은 병원균을 박멸하고 국가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면에서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자동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이었다. 반면 백신은 바이러스를 변형시켜 함께 사는 행위로 구제역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살만이 계몽된 정부가 이끄는 절도 있고 질서 잡힌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 p.164

구제역은 영국에겐 군사 방위적인 요소로도 인식되었는데, 2차세계대전 당시 구제역이 일반화되고 백신정책 위주였던 유럽 본토와 달리 도살정책을 실시하던 영국에게 있어서 구제역 바이러스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감소시키는 매우 유용한 화학무기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군사적 필요성 외에도 사회적으로도 백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회적 담론이 형성됩니다. 2001년엔 무려 천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도살되자 농촌 지역사회, 여행 산업계, 상당수의 농민들은 백신을 지지한 반면 전국농민연합과 정부는 여전히 도살정책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2001년에도 대량 도살에 의해 광범위한 유행을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이 정책의 심각한 사회적 및 심리적 후유증과 경제적 비효율성이 명백히 드러났다. 질병을 통제하는데 농부들에게 지급된 보상금, 관광 및 연관산업의 손실 등 영국 경제 전반에 걸쳐 80억 파운드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도살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보호하고자 했던 가축 및 관련 상품 수출 분야의 규모는 연간 13억파운드에 불과했다. 모든 조사단은 향후 통제 정책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어느 때보다도 안전해진 백신을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다. - p.237 

결국 구제역이란 질병을 대함에 있어서 도살정책을 실시한 것은, 구제역이 가축을 죽여야 하는 병이라서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죽이는 것이 더 이익이였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좀더 수월하게 팔기 위한 청정국 자격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정치적 알력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도살정책이 이익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더이상 도살정책이 아닌 백신정책으로의 전환할것을 요구합니다. 세계화된 교역 패턴으로 볼때 도살정책은 이제 비효율적이며, 백신 기술의 발달로 백신 사용에 대한 과거의 기술적, 과학적, 문화적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01년 구제역 유행에 대한 앤더슨 청문회의 주장대로 우리는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하도록 운명지어지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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