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부동산 - 일본 부동산황제 센마사오의 교훈
단 이사오 지음, 박재현 옮김 / 사이몬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노래하는 부동산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가수 센 마사오는 한때 재산이 3천억 엔에 이르렀고,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녔으며, 일본 뿐만 아니라 홍콩, 호주, 영국, 미국 등에도 호텔과 별장을 보유한 갑부였습니다. 그는 가수 활동으로 생긴 신용을 바탕으로 부동산을 샀고, 그것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다시 부동산을 사는 방식으로 엄청난 자산을 모읍니다. 하지만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빠지자 1천억 엔의 빚을 지고 파산을 선고받습니다. 센 마사오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하여금 부동산 투기의 교훈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센 마사오는 전형적인 전쟁후 세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랐고, 가족 대부분은 어렸을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한 반면 센 마사오는 어머니의 고집에 의해 고교 진학을 합니다. 센 또한 하숙비를 벌기 위해 자전거로 얼음을 배달하거나 강가의 모래를 운반하는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레코드를 듣는 것이였는데, 어느날 센은 가수가 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당시 인기 작곡가 엔도 미노루의 문하생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수학여행에 가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쿄로 상경한 센은 엔도의 집앞에서 배수의 진을 친 끝에 문하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센은 세 곡을 발표했음에도 인기를 얻지 못했고, 결국 엔도의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센은 밤에는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래를 냈고, 술집마다 방문해 취한 손님들에게 레코드를 팔았고 공중전화로 자신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신청곡으로 반복 신청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결국 3년의 무명생활 끝에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히트곡으로 스타의 자리에 올랐지만 성공에의 확신을 하지 못했던 센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꾸준히 돈을 모읍니다. 그런 센에게 레코드회사의 전무였던 다케무라 마사야씨는 센에게 부동산을 사두는것을 추천합니다. 센은 돈을 빌려 5만평의 토지를 구입했고, 이 토지는 주택을 지을수 없었던 그린벨트 지역이였지만 담보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센은 이 땅을 시작으로 사업가의 길을 시작합니다.

센은 연간 200곳이 넘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많은 수입을 올립니다. 그의 수많은 지방공연은 또한 많은 인맥을 얻게 해주었는데 이런 인맥은 그의 사업에 큰 도움을 줍니다. 센은 토지를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방식으로 단기간에 많은 부동산과 많은 빚을 늘려나갑니다. 이러한 전략은 담보가 된 토지의 가격이 계속해서 상승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09억엔에 산 토지가 200억엔으로, 1억 2천만엔에 샀던 건물은 30억엔으로, 9억엔의 토지는 31억엔으로, 센이 구입한 토지는 3~4배 이상의 이득을 가져다 줬습니다. 은행은 담보로 잡힌 토지의 가격이 계속 오르는 이상 융자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돈으로 센은 더 큰 땅과 건물을 보유합니다. 그의 자산총액은 3,000억엔까지 치솟았고, 임대건물은 110채가 넘었습니다. 이런 성공은 그의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신용금고의 이사장을 비롯해 재계의 회장급 인물들과도 알고 지냈습니다.

센의 이런 눈부신 성공은 정부의 정책에 잘 편승했기 때문입니다. 1983년 나카소네 정부는 시정방침 연설에서 정부자금으로 행해져 온 공공사업을 민간 자금이나 사업 활동에 위임한다고 밝히고 도시재개발계획을 수립합니다. 나카소네 정부는 건설성에 용적률 변경을 지시했는데, 토지의 용적률이 높아지면 건물의 층수를 더욱 높일 수 있고, 단위당 토지이용률이 증가하기 때문에 지가폭등, 고층빌딩, 고층맨션의 건설 붐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나카소네 정부의 다른 주요 시책인 종합보양 지역정비법, 소위 리조트법이라 불리우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 법은 지역진흥, 내수확대 등을 목표로 일본국토면적의 16퍼센트에 달하는 지역에 골프장 170여곳, 스키장 110여곳 등의 종합리조트를 짓는 법이였습니다. 나카소네 정부의 일본열도 개조는 여분의 자금을 투자할 곳을 찾고 있던 기업들에게도, 적자 재정으로 공공사업도 지지부진했던 정부로서도 매우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85년 프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강세가 진행되었고, 기준금리가 낮아져 돈은 주식이나 토지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유례없는 부동산 거품이 만들어집니다.

1989년부터 1990년 초까지 일본의 부동산 투자액은 1,800조 엔에 이른다. 국고예산이 60조 엔이니 약 30배의 규모다. 이것은 미국을 4개나 살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투기 이면에는 '주식이나 부동산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강했고 시장은 그것을 강하게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 p.140

고금리정책, 부동산 대출 규제와 같은 정부의 거품대책이 시작되며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져가기 시작합니다. 부동산을 저당잡히고 다시 부동산을 사던 센의 사업방식은 자산회전이 둔해지며 단숨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센은 전재산을 매각하기 시작했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였습니다. 다시 가수로 돌아가 연예활동을 하며 매월 15~16개 업소를 도는 강행군의 지방공연으로 월 1억엔의 수입을 올렸지만, 센은 빚의 이자로 하루에 5,000만엔을 내야 했습니다. 한때 특급 외제차와 자가용 비행기를 타며 부동산왕, 노래하는 황제로 불리웠던 센 마사오는 아내와 이혼한 후 가라오케 반주기로 노래를 부르며 일본의 시골구석을 누비게 됩니다. 이런 센의 일생을 통해 알수 있는 거품경제의 일면은 여전히 '그래도 믿을건 부동산밖에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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