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플리카 - 불변의 진리를 찾아 나선 옷 탐험가들
박세진 지음 / 벤치워머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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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리카, 불변의 패션 브랜드로 보는 문화사

전쟁은 식문화, 통조림과 같은 저장음식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복식사, 그중 레플리카와 같은 재현방식의 재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후 군복은 내구성이 좋아 일반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능성 의류가 필요해졌다. 군복은 아니었지만 미의식이 아닌 기능성 옷의 출발은 거의 유사하다. 스포츠류도 그렇고 특히 작업복으로서의 청바지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 품목이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이후로는 패션브랜드의 중심은 생산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생산자 중심의 브랜드가 호응을 얻고 있는 추세가 되었다. 헤리티지 브랜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이 책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때마침 미국에 악성 재고로 쌓여 있던 20~30년 된 리바이스와 리의 청바지가 데님 헌터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기 시작했고, 구제 청바지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전 의류를 똑같이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레플리카 청바지가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5쪽


우선 일본의 유명브랜드 유니클로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빈티지 레플리카 브랜드가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굳건히 살아남있는데 빈티지 레플리카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청바지를 제조하면서 유니클로는 자신의 브랜드에 어울린만한 합리적인 가격, 지나치게 비싼 청바지를 고객들이 자신들의 매장에서 구매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소 저렴한 가격에 사람들이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미국에서의 빈티지 레필리카 패션은 일본과는 조금 다른데 페이딩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은 청바지를 멋대로 낡게 방치하지 않았다. 이왕에 페이딩이 될 거라면 자연스러운 것보다 의도를 넣는 데서 재미를 찾은 것이다. 140쪽


청바지가 사람들에게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게 내구성이 좋은 기능성 의복이기 때문에 20세기 초 산업기술이 발전하고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면서 여성 의복의 종류도 함께 들어났다. 이전까지는 주로 일하는 사람들의 성별이 남자였기 때문에 청바지를 포함, 레플리카 브랜드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위의 발췌문처럼 재현 방식이 과도하게 흐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론 어릴 때 부터 과하게 티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리바이스의 투박한 스타일의 레플리카 청바지 브랜드가 가장 익숙한 것 같다. 물론 브랜드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말이다. 일본인 들중에서는 미국식의 재현방식을 맘에 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국이 아닌 미국에서의 레플리카  청바지를 입고 멋내기 시작하였다. 어떤 브랜드의 경우는 일본으로 들어왔다가 빈티지 상태로 돌아간 뒤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류의 방식을 아메리칸 빈티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레플리카 방식의 트렌드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거품경제가 한창일 때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곳의 다양한 곳을 찾아다니는것이 트렌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재현방식 뿐 아니라 창업유형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롭던 시대에는 빈티지 일지라도 고각의 청바지가 잘팔리다가, 그 반대의 경우는 소규모 창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정말 이렇게나 많은 청바지 레플리카 브랜드가 많은 것에 대해 다소 놀랐다. 게다가 부록으로 포함된 '부가정보'에는 청바지를 제조하는 데 주로 사용되는 원단, 직조 방식등 꼼꼼하게 적힌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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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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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리 멜론과 제시, 두 사람이 빅서에서 한동안 지내기 까지의 과정, 그곳에 잠시 머물거나 스치거나 했던 사람들과의 해프닝을 다뤘다. 맬론과 제시가 빅서에 당도하기 전 두사람이 만나게 된 사연과 멜론의 조부인 남북전쟁에 참전 한 오거스터스 멜론 장군이야기가 그려질 때는 가승전결이 뚜렷한 소설들과 방식이 달라서 몰입이 어려웠다. 그러다 제시가 사귀던 신시아와의 결별 후 멜론이 머무는 빅서에 도착하면서부터 조금씩 그들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었고,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평범한 나를 깨닫고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소설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데자뷰 같은 걸 느꼈는데  로베르토 볼라뇨의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읽었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작품과 작가사이에는 연관성이 없겠지만, 마치 아동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느껴져 그랬을 것이다. 자신외에 주변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사실이 아닌 느낀 것을 그들만의 유머로 풀이하는 모습, 독자는 아직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마치 소외시키듯, 자신들과 같은 유머에 동참할 게 아니면 그만 책을 덮어도 좋다는 자신감같은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제시의 거처인 오두막 천장의 높이가 155cm로,  낮은 천장 때문에 알면서도 게속 부딪히며 아파하다가 오두막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부딪히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들의 유머에 스르르 공감이 되었고, 살짝 고통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기도도 했다. 돈이 없어 먹을게 없는 그들이 도구를 가지고 조금씩 부셔먹어야만 하는 딱딱한 빵을 먹는 상황에서는 중국 여류작가 샤오홍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난, 그로인한 배고픔을 그리는 부분이 실제 체험을 통해 소설로 집필했던 점이 유사했다. 물론 브라우티건 역시 그런 배고픔을 겪었을런지는 모르겠다. (작품해설을 보면 아내와 함께 빅서에 머물렀을 때의 경험이 담겨있다고 하니 비슷하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날 저녁은 일레인이 요리를 했다. 가스레인지 앞에 여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폭찹을 만드는 동안 그녀는 우리의 여왕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동안 리 멜론의 요리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망가뜨려놓았는가를 깨달았다. 132쪽


1960년대 미국에서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마리화나 등을 포함한 마약류가 불법은 아니었다. 약에 취한 그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50년 뒤에 미래사히에서는 어쩌면 sns가 불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강제로 손에서 빼아을 경우 금단현상이 일어나며 현실을 환상과 착각하고 그 안에서 희열을 느끼는 부분,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으니까. 제목으로 돌아가서  남북전쟁, 그것도 남부 장군이 타이틀에 등장하고, 약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그들의 이야기 뒤에 꼬리처럼 달라붙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부분은 해설을 읽고서야 이해가 되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계기,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심리상태가 마치 현실과 환상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리와 제시에게는 전쟁을 유발시킬 만큼 이기심이나 명에욕, 누군가를 악질적인 의도로 속이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멈추기 위해 그들을 잡아서 게곡에 던지고 때로는 등에 돌을 매달아 되돌아오는 기간을 늘리려고 애쓰기고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하다고 떠들 뿐 리가 체념하듯 인정했던 가장 합리적인 개구리울음중지책은 일레인이 악어를 데리고 오기전까지 그저 ‘캠벨수프’라고 외치는거였다. 리와 제시는 스스로가 심각하다고 느끼는 부분들도 희극적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위스키가 좋았다. 나는 별들에게도 술을 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면서, 때때로 별들도 술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67쪽


굶주린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굶주려 본적도 실제 미친사람을 만나 본적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어저면 내착각일 수도 있다. 타이노가의 비교를 끊임없이 하고, 그롱인해 상처받고 나를 더 사랑하자며 수없이 많은 심리서를 찾는 나는 분명 영혼이 굶주린 것과 다름이 아니다. 또한 미친사람들,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자신의 잘못을 부하직원에게 더넘기는 사람들도 어던 면에서는 미친 게 아닐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영화, 드라마나 늘 듣는 노래속 가사에도 ‘미친’사람들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면서 이 소설에 이토록 빠져들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빅서에서 오지도 그곳에 갈 수는 없어도 나는 여전히 환상속에 나와 현실의 나의 괴리감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역시나 이런 소설덕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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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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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믿음직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면 인간의 자연의 자연스러운 본능은 오점을 찾고, 엑스레이로 금간 부분을 찾는다. -중략-

북유럽 지역은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자신들만의 문제와 난관, 그리고 비뚤어진 기벽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537쪽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면 핀란드를 떠올렸을 때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 '연어'가 떠올라서 헬싱키에 가정식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반농담조로 말하는 사치에가 나온다. 그런가하면 '갓챠맨'주제가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동거하고 식당일을 돕게되는 토미, 그리고 나중에는 미도리까지 등장한다. 책 리뷰를 쓰면서 특정 영화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의 저자 마이클 부스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상황이나 그들이 핀란드로 직접 와서 확인하기 전까지 핀란드의 안과 밖의 모습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아내 업고 달리기, 기타소리 흉내내기 등 수십년간 부모의 병수발을 들었던 미도리의 눈에 핀란드 사람들은 여유롭고 걱정이라곤 없을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렇지만 막상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 같은 일본사람 사치에와 토미를 제외하고 긴밀하게 관계를 맺게되는 여인은 식당을 바라보며 험상궂은 표정을 짓다가 사라지는 리사다. 별걱정 없어보였던 그들도 결국 한가지씩의 고민은 다 가지고 있구나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이클 부스도 마찬가지다.


몇년 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있을 때 만우절 기사라고 여겨질 만큼 '덴마크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소개된 것에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본인이 느끼기에 덴마크는 '축축하고 따분하고 생기 없는 작은 나라'(6쪽) 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덴마크가 위장을 기가막히가 잘하는 나라며, 덴마크 뿐 아니라,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마지막으로 스웨덴을 포함, 총 5개 나라의 진짜 모습을 책으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우리가 자연과 함께 하는, 조용하지만 국민들의 삶은 평온 그자체라고 믿으며 유토피아로까지 착각했던 북유럽 5개국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요인이 합쳐져 국민 정서를 만든다. 내가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립성을 향한 이 같은 편협주의 적 충동과 그에 수반되는 민족낭만주의 성향은 덴마크스러움의 결정적 요소다. 이는 모든 덴마크인이 지금도 외우는 다음의 말로 요약된다.

"밖에서 잃은 것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40쪽


위의 발췌문의 말은 덴마크 시인 홀스트가 쓴 말인데 과거에 덴마크는 스웨덴에게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고, 1801년에는 영국 함대로 부터 시민 2000여명이 민간이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 1864년에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독일로 넘겨주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에는 독일 연합국으로 분류될만큼 독일에게 농산물과 병력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난과 수탈의 가혹한 역사를 가진 덴마크인들의 태도는 순응에서 머물지 않고 위의 표현처럼 좋게 말하면 순응, 나쁘게 표현하자면 퇴화상태로 머물게 된다.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 '세금에대해 불평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세금을 낮추겠다고 공약하는 정치가도 없다. 이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마치 좋은 집, 좋은 차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덴마크에 관한 이야기만 적었을 뿐인데 왠만한 책 한권 분량의 리뷰가 나왔다. 심지어 아직 덴마크에 대해서도, 다 꺼내놓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대략 한 나라의 역사를 들려주면서 어쩌다 외부인이 보는 이미지와 실제 모습의 차이가 느껴지는지는 대략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무엇보다 제목이나 분위기로 보자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 감성적 성향이 주를 이룰 것 같지만 마치 패권의 역사, 스칸디나비아의 청사진을 위한 영국인의 분석으로 느껴질 만큼 진중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아, 하게 되는 5개국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토미나 미도리처럼 현지에 갔을 때 의외라는 식의 반응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영국인 저자가 아닌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또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을거란 가정에 더 큰 기대로 이 나라들을 여행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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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 - 아는 역사도 다시 보는 한국사 반전 야사
김재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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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는 역사책, 찌라시 한국사


역사가 재밌구나를 알게 된 게 아마도 서른 이후였던 것 같다. 어릴 때 납량특집으로 해주는 '전설의 고향'류의 사극외에는 잘 안 볼만큼 역사는 곧 지루함, 임기과목이란 공식이었는데 서른 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10주 정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것이 역사의 흥미를 붙이게 된 계기였다. 성적과 무관하게 여유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재미있게, 어느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국사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 바로 <찌라시 한국사>다. 드라나 영화로 제작될 만큼 인기있는 역사적 사건도 있고, 처음 알게 된 미스테리한 사건들도 있는 데 들려주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그알못 처럼 사건을 파헤쳐가며 추리소설 분위기를 내는 경우도 있고, 역사속 인물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성토하듯 쓴 역사이야기도 있다. 특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매체와 비교하며 이해를 돕는 등 저자의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우선 목차를 보기만 해도 대략 이 역사책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끌리는 제목 중 단연 '어둠의 서막, 연산군 비긴즈'를 손꼽고 싶다. 사실 엄청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고, 백성이나 신하의 입장에서 보면 분노할 일이긴 한데 하나의 스토리로서 보자면 연산군은 그야말로 왠만한 히어로즈문에 등장하는 굴곡진 히어로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극한 직업, 광해의 이복동생으로 살아가기>의 제목도 만만치 않다. <그것도 알고 싶다, '고려 미제 살인사건'>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건데 몽골 사신 저고여의 죽음을 다룬 것이다. 마치 그알못 제작진이 등장한 것처럼 몽골과 고려조정 중 누가 사신을 살해했는지 각자의 입장을 들려주고, 단순히 역사를 전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범인은 누구일지 추측할 수 있도록 당시 상황을 전달한다. 물론 역사를 재미위주로만 보는 것은 사실 위험하긴 하다. 언젠가 다른 책 리뷰에서 쓴 것처럼 지나치게 오락성만 강조한 역사공부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기억하고 정작 달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아둔함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와 달리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사실에 근거하여 집필한 흔적을 옅볼 수 있다.



저 역시도 역사 문외한 시절이 있었기에,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책을 어떤 역사 전공자보다 쉽게 쓸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는 쉽게 풀어가지만 철저한 고증은 물론이고, 시대를 투영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 정신으로 한 꼭지, 한 꼭지 풀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 에필로그-


정정화 지사와 관련된 내용은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인물 중 한 분이시다. 바로 앞에 리뷰를 남겼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의 정찬우라는 인물처럼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정지사가 전쟁과 분단이라는 안타까운 사건으로 인해 존경은 커녕 이념문제로 조국에서 버림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순서상으로는 <찌라시 한국사>를 먼저 읽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금 마음이 저릿해지기 까지 했다. 위의 저자가 했던 말 그대로, '올바른 역사 정신으로 한 꼭지, 한 꼭지'썼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진 부분이다. 역사를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굳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아도 다들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까지가 허구고,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리고 싶지는 않지만 쉽게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찌라시 한국사>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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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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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 안재성 장편소설


안재성 작가의 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의 중심줄거리는 북쪽에서 교사로서 활동하던 정찬우가 전쟁발발 후 당의 명령으로 인민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군과 함께 남하하면서 겪게되는 고초를 다룬다. 만주로 유학을 갈 만큼 총명했던 학문 뿐 아니라 민족에 대한 열정과 인성 자체가 바른 인물이었다. 가족과 일부러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저 친일파가 권세를 누리는 남쪽에 대해 큰 호감이 없었기에 당에서 명령한 일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행하였다.


얼마 후 정찬우 일행은 둘씩 짝지어 진주 읍내 중학교와 농업전문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느라 바빠졌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남조선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이며 남조선의 과거 역사교육은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사상이라는 내용이었다. 59쪽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라는 표현이 틀리진 않지만 당의 명령으로 거주지나 직업에 제한을 받는 북조선식 사회주의가 반박할 만한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픈건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가 현재는 재벌, 돈을 중심으로 한 노예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전쟁 초반에는 북쪽이 우세였기에 군과 함께 다니며 계절음식을 먹는 등 마치 전시상황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서울을 지나면서부터 날아드는 총과 유엔과 미군이 하늘에서 뿌려대는 총알에 정신없이 쫓기게 되면서부터 독자인 내게도 전쟁의 참혹한 상황이 전해졌다. 그런 상황속에서 판단이 흐려진 군간부들은 조금이라도 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즉결처분을 명하는데 그때마다 파리보다 못하게 사라지게 될 생명을 살려낸 것이 정찬우였다. 그가 권력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권력을 제대로 이용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루아침에 민심이 바뀌다니. 우리가 서울에서 보았던 민중들의 표정은 전부 거짓이었을까? 서울역 광장에 모여 있던 의용군은 모두 강제로 끌려나온 이들이었을까? 인민군이 다시 오면 이번에는 또 인민군 만세를 부를 것인가? 103쪽


국군과 인민군의 우열상황에 따라 민심이 변하는 것이 정찬우의 눈에는 배신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 민중들 중 하나였을 나의 입장에서는 그저 안타깝고 안타깝기만 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영화나 소설, 실제 전쟁에서 벌어졌던 대량학살 사건을 알면 알 수록 더욱 그랬다. 도대체 이들의 자유는 누가 보장하는가. 그게 권력이든, 사유재산이든 가진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오히려 자유를 빼앗긴 것은 민중이었으니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감방이었다. 자살을 할 수 없도록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감시하는 곳이 감방이었다. 목숨을 끊기 위한 노력은 살아남으려는 노력보다 훨씬 힘들었다. 221쪽


사방에서 터지는 폭탄을 피해 얼어붙은 시체옆에 눕고 관에까지 들어가야 했던 정찬우에게 '살고자 하는 희망'도 '삶의 포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봐도 그의 사람됨이 느껴지지만 전쟁과 남을 짓밟고서라도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이기적이란 말조차 아까울 정도의 비이성적인 존재들은 포로가 된 그를 가만두지 않는 포로생활 동안 그에게 잠시나마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판을 통해 10년형이 선고받은 그는 다시금 전쟁한 가운데에 서있는듯한 탄식만 남겨졌다.



사실 소설을 읽는 내내 전쟁중에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상황을 읽을 때보다 박창섭과 같은 비인간적인 것(?)들의 장면이 훨씬 읽기 괴로웠다. 더 답답했던 것은 뻔히 보이는 그런 간교함과 모략을 어째서 북이나 이남이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단 전쟁처럼 목숨이 달린 상황이 아니고서도 충분히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화가나서 도대체 내가 이 소설을 왜 읽으며 화를 내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 소설의 제목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가 정찬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이미 지난 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왜 분노하면서 화를 내고 있을까. 민중들의 변심에 배신감이 아닌 동정심이 생겨난 까닭도 어쩌면 내 삶만 중요하다는 생각, 적어도 박창섭처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진 않았다는 교만이었다. 괴로워도 기억해야했다. 이 소설을 두고 조해진 소설가는 다음의 평을 남겼다.


'이 소설은 잊혀진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도한, 한 사람의 끝나지 않을 오열이다.'


이 울음을 받아낸 소설가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그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를 위해 희생되었을 많은 이들을 위해 기억해야 한다고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책을 읽기 전, 전쟁소설이 주는 괴로움과 어두움이 두려워 피하려는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고통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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