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니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막내딸에게 붙이기로 최종적으로 합의한 그 이름은 약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그애 아버지와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9

 

 

 

이야기의 시작은 소설의 화자인 '에츠코'의 둘째 딸 니키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딸, 자녀는 흔히 '미래' 혹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형용사는 다름아닌 창백하다는 다소 부정적이고 암울한 상태를 의미한다. 에츠코가 살았던 과거 한 때는 그토록 '창백한'풍경이었을 수 있으나 마치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저자가 독자에게 던져주고 싶은 바는 '희망'이라고 말하는 듯 싶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원폭이후 재건되어 가는 나가사키의 모습과 그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시골의 한 황무지 인근의 아파트와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은 오두막에 살던 사츠코와 그녀의 딸 마리코상을 추억하는 에츠코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와 함께 에츠코의 첫 번째 남편이자 자살한 게이코의 친부인 지로와 그의 아버지 오가타상 그리고 주변인들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또 달리 이야기하자면 전쟁 이전에 부귀영화까지는 몰라도 명예와 안정적 삶을 살았던 아버지 세대와 전쟁이후 실질적으로 재건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친 아들세대간의 대립도 그려진다.

 

 

 

"아이는 어른이 되지만 성격은 변하지 않지." 171쪽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부모님을 이해하기 전에 사회인이 되거나 혹은 자신의 가정을 꾸려 '가장'이 된다. 결국 위의 저 말을 건넨 오가타상도 그의 아버지 눈에는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변함없이 고집센 혹은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로만 보일 것이다. 이 소설을 에츠코의 시각에서 보자면 엄마의 딸의 관계, 혹은 1950년대 전후의 아시아 여성들의 굴레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내 시선을 끈 것은 오가타상과 지로, 오가타상과 게이오의 관계에 더 머물게 되었다. 모처럼 휴가라는 명목으로 아들지로와 며느리 에츠코상 집에 머무르지만 지로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도, 체스게임도 진지하게 함께하지 못한다. 그런 지로를 따끔하게 혼내기는 커녕 계속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오가타상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과 크게 다투지 않으려는 약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글의 배경은 1950년대인데 내용만 봐서는 70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가타상과 게이오와의 관계만 보더라도 학창시절 존경받던 교장 오가타상은 그의 제자이자 아들의 친구인 게이오에게 기성세대, 자신의 능력을 옳은 일에 쓰지 못한 편협한 지성인으로 평가된다. 열심히 살아온 것밖에는 없던 오가타상은 게이오의 변명을 곱씹기 보다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의 성실성과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만 들리며 '젊은 사람들'이란 표현을 거듭사용하며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해. 237쪽

 

 

 

앞서 이 책의 서두가 딸 '니키'의 이름과 관련되고, 자녀의 이야기로 시작됨은 희망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고 밝혔다. 위의 말은 에츠코가 이미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런던에서 살고 있는 니키에게 해주는 말이다. 단순히 최선을 다해 살라고 하는 말이 오가타상 세대의 이야기라면 그 이후 세대, 게이코가 이국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재혼한 에츠코의 말은 좀 더 희망적이다. '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국가 혹은 사회와 같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에츠코의 저 말을 보면서 저자가 적어도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저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전쟁이든 취업난이든 혹은 4포 세대로 살아가는 현실이든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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