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 유언 / 안드레이 마킨


내게 있어 프랑스는 이제 단순히 골동품을 넣어 두는 방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감각적이고 견고한 하나의 실체가 되었고, 그 중의 한 작은 부분은 어느 날 내 가슴속에 이식되었다. 136쪽

안드레이 마킨의 자전적 소설 [프랑스 유언]을 읽기 전 내게 있어 프랑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프랑스라고는 해도 파리를 여행해본 경험이 전부라서 어쩌면 장님코끼리 만지는 수준일테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적어보자면 우선 언어로 먼저 다가온 나라였다고 말하고 싶다. 에펠이라던가 영화라던가, 패션의 화려함보다 영어가 아닌 독특한 언어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성인이 되어 방문한 파리는 기대만큼의 화려함도 추억거리나 볼거리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면 이 무렵 프랑스영화에 빠져있었는데 영화에서 받은 그 충격을 현실에서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파리여행 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 속의 파리는 대도시가 갖는 허무와 우울을 가진 상징적인 도시다. 얼추 마음속에 산발적으로 떠오르던 키워드들이 오히려 이 책 덕분에 하나로 모아진듯했다. 낭만보다 우울, 화려함보다 공허함이 감도는 도시 파리로 두 번째 여행을 갔을 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지켜야 한다'라는 사명감밖에 없었다. 몇 해사이에 파리에는 폰을 노리는 범죄가 급증한 상태였고, 중심가가 아닌 곳에서도 노골적으로 돈을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의 패션은 눈에 띄게 완벽했고, 일본과는 다른 친절함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파리가 친절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있어 파리는 친절한 도시였다. 그리고 저녁때면 센강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소박함과 웃음소리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에 굳히기를 한 작품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로랑스 코세의 <오 봉 로망>이었다. 좋은 소설을 파는 서점이라니, 아이디어도 내용도 완벽했다. 좀 멀리 돌아왔는데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프랑스는 호불호로 나뉘자면 당연 호에 해당되는 나라였다. 안드레이 마킨에게는 프랑스가 어떤 나라였을까? 맨 위 발췌문정도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들의 유년을 살펴보면 외부에서 기인했든 내부적인 문제가 되었든 책에 한참 빠져드는 시기가 존재한다. 소설 속 '나' 역시 할머니로 부터 들었던 프랑스 덕분에 쉼없이 도서관에서 관련 도서를 찾아읽게 된다. 러시아 아이들의 무시는 오히려 그를 더더욱 프랑스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 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이야기를 읽기만 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입장으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 순간을 사춘기의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또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화자로서의 역할을 맛본 나는 사란짜로 할머니 샤를로트를 만나러 가면서 이전과는 달리 그녀의 이야기가 이전처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머니와 포옹하는 동시에 그런 착각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원치 않아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부모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거나 심지어 끝까지 무시하고 우쭐대기까지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저자의 심경변화가 당시 열네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했을 때 제법 성숙했다고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내가 성숙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 징후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내가 예전에 갖고 있던 순진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애석해했다. 182쪽

무언가에 열의를 다하면 다할수록 그것이 또렷해지지 않고 흐릿해질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미칠듯한 열정은 이내 곧 식어버리기 마련이고 프랑스에 대한 주인공의 마음도 그런 단계를 밟게된다. 심지어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되어 할머니 샤를로트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 참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 샤를로트에게 프랑스와 관련된 일화를 들으면서 '나'는 묘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듯한 기쁨을 맞이하게 되고 어느순간 그것을 할머니로 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결국 '나'라는 존재가 프랑스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혹은 그 둘 모두를 거부하고 싶어지는 저자 심리를 자전소설이 갖는 장점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우리에게 전달되면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과 그로인한 처절한 아픔과 상처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작품이 왜 비평가들에게까지 극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되었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결말에 이를수록 이 책이 던져주는 감동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저 이제 프랑스를 떠올리면 한동안은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사진을 챙겨 넣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샤를로트를 생각하자 그녀의 존재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듯한 그 거리 속에서 내밀하지만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내게 부족한 것은 그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뿐이었다. 3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