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 작가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기 전까지 내게 있어 '바람이 분다'라는 구절은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수십년을 그렇게 바람이 불면 살아야하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했던 내게 느닷없이 바람분다고 달달한 연애감정이 반가울리 없었다. 살아야만 하는 것과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다고 어리석게 생각해왔었는지도 모른다. 2016년 10월. 그나마도 며칠 남지 않고서 이병률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이런 내막을 바탕으로 보자면 이제사 내게도 '사랑'에게 곁을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고 믿고 싶다. 비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하고픈 마음도 숨기지 않겠다.



11#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돗물을 마시고 살아온 것일까. 주체를 우리로 하지 말고 그냥 '나'라고만 해도 밥벌이와 상관없이도 수돗물을 마셔야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과는 진짜 수돗물이라도 기분좋게 취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주류 광고문구처럼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는 그 술이 참 그리운 가을이기도 하다. 저자는 바람이 불어서 당신이 좋다고 했지만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이 말이 다름아닌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라 했고, 삿포로에 갈까요 하고 묻는 것 역시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읽다보니 저자와 내가 닮은 구석이 있었는데 '눈'을 엄청 좋아한다는 것, 그이유로 '삿뽀로'를 좋아하는 사람과 꼭 가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부럽게도 좋아하는 이와 삿포로를 다녀온듯 한데 나는 아직 그러질 못했다. 함께 가고 싶었던 사람이 없어서 가지 못한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스산했다.



35# 어쩌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


정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버둥거립니다.



사랑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랑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내 머릿속, 기억속에서만 증명할 수 있다. 당사자가 부인하기라도 하면 둘 사이에 있었던 그 좋았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어쩌면 진짜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 서글프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서두에 이병률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삶의 여유가 생겨 이제 사랑을 말하는 이토록 간질간질한 마음도 비집고 들어오는가부다 하고 짐짓 허세를 떨었으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을 무심코 펼쳤다가 바로 이 문장 때문에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 마음까지 다다를 수 있었는지 읽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다. 차례차례 읽어오면서 아, 이 책을, 이작가의 글을 지금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파를 볶다가 무작정 짐을 꾸려 떠나본 적이 있는 나라서 다행이었고, 그 언젠가 내가 참 초라하고 작았을 때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깨달은 지금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없는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라서 다행이었다. 이제부터 '바람이 분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면 '당신이 좋다'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살아야겠다'하는 무언가 처절함과 의무감 대신에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