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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신자유주의에 의해, 신제국주의에 의해 혹은 '규범'에 의해 누군가는 지금 이순간도 '박탈'당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내가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박탈당하고 있는 지금 과연 얼마나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느냐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체가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내 스스로를 '박탈'상태에 놓인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권리와 터전, 소속의 양태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있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쪽
모든 문제의 발생이 자아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만 고쳐먹으면, 마음만 달리먹으면 그 어떤 '박탈'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면에서 보면 관대하거나 포용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만일 수도 있다. 우리가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말은 한마디로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며, 의지한다는 것 부터가 이미 그들에 의해 언제든 소유지는 물론 권한 권리를 '박탈'당할 수가 있다는 뜻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박탈'을 우리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팔렌스타인의 개인 소유지 몰수, 미국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은 물론 국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과 사고에 대해 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소리를 흘려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은 우리를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그리고/혹은 고통스럽게 사용 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혹은 만들지 않는 사회적 규범과 자원들과의 비판적 관계를 경유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서로에 대한, 그리고 또한 서로 간의 관계를 조건 짓는 기반들에 대한 우리의 낯설은 취약성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서로의 요청에 응답하게 됩니다. 180-1쪽
박탈이란 용어가 토지에서 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단순하게 사유지를 몰수하고 제안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젠더에 의한 박탈, 그리고 저항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박탈상태에 놓는 것으로까지 확대된다. 젠더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최근 끊임없이 거론되는 '여혐'이란 단어와 맞물리기도 하고 그동안 줄기차게 담론화 되었던 '성소수자에 대한 인정'부분과도 밀접하다. 퀴어라고 표현되는 단어가 초기에는 동성애자들을 비하하는 속어이자 자신들끼리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은어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젠더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해당 부분과 관련된 내용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은 그동안 버틀러과 관련지어 발표했던 내용들을 보완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 작업을 아타나시오우가 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역자의 말처럼 단순히 보조적인 입장에서만 머물지 않고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강하게 의사를 표명하고 명확하게 의견을 제시해주길 요구하는 등 부제에 쓰인 '대화'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어려운 용어라기 보다는 익숙치 않은 용어와 대화중 언급되는 발췌글들의 오류를 정정해주는 등 역자의 수고가 참 고맙게 느껴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