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107쪽



[새로운 계급투쟁]이란 타이틀을 보면 책 내용을 읽기도 전에 뭔가 두렵고 무서운 기분이 든다. 계급이라는 단어가 이미 차별적인 발언같은데다 투쟁이라니, 무언가 폭력적인 사태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타이틀을 사용해가며 지젝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책의 부제에 적힌 것처럼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결코 만만한 주제는 아니다.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내전이나 종교분쟁으로 난민들이 이주하는 것이 문제되고 있다. 공포에 가득찬 거주지역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목숨을 걸고 그나마 안전이 보장될거라 믿고 있는 유럽으로 이주하는 것인데 대책없이 평화를 운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열거하며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흡수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일일까? 난민은 안타깝고 불쌍하기 때문에 온정을 베풀어 받아들여야 하고, 우리나라에 와있는 다문화 인구는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 온 것이라 배타적으로 상대해도 괜찮은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을 깊게 들어가기 전에 지젝이 난민과 테러의 원인으로 꼽은 것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한다. 자본주의가 어쩌다 자유, 평등과 동일어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자본주의 사실상 금전으로 계급이 나뉘는 것을 합법적으로 수긍한 것이나 다름없다. 종교갈등으로 인한 분쟁이 내전을 일으키고 테러를 일으키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유럽열강에서 착취하는 경우도 대부분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는 돈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바탕이 된 이념은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의 반대의 의미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이 다름아닌 공산주읜데 불과 20~30년전만 해도 우리는 함부로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념을 의심받을 뿐 아니라 실제로 감시까지 받았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런데 지젝이 다름아닌 공산주의를 이 책에서 언급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 공산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쇠퇴해고 폐배했다. 공산주의를 해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로 인식하면서 자본주의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개인주의적인 측면의 부정적인 면을 절제하고 조정하는 측면에서의 업그레이드 된 공산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젝은 '군사화'를 언급한다. 군사적인 체제라고 하면 역시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투쟁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암울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지젝이 뜻하는 군사화는 난민들을 수용할 때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 단시간내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체제가 다름아닌 군사적 시스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주하는 난민이 앞서 이야기한 분쟁이나 내전으로 인한 피난만 떠올리는데 사막화된 지역에서의 생계유지를 위한 피난도 여기에 해당된다. 자연의 힘앞에 우리는 무능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난민체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해결할 것인가는 비단 유럽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더불어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부분은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간과 이슬람 문화가 충돌할 때 어설프게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의 방임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령 얼마전 보았던 터키영화 <무스탕>의 여성의 불평등한 처지를 단순히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자는 방식으로 모른 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 누구라도 노마드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구 공산주의가 아닌 발전된 공산주의 등의 이념을 확립하는 식으로 개인이 아닌 집단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의미의 새로운 투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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