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고 있는 소녀를 보거든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김지현 / 레드스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흔들리고 있는 소녀를 보거든 /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표지에 성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파란색 스웨터를 입은 아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그레이스'다. 바람에 나부끼는 듯 보이지만 표지만 자세히 보아도 아이의 머릿결이 헝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람 때문이 아니라 약물에 취해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 때문이라는 것을 몇 페이지만 넘겨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아이가 밖에 나와있는 이유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지만 엄마와 떨어지는 것은 그레이스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빌라 현관에서 저렇게 매일 가로등 불이 켜지기 전 까지 앉아있다.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커튼뒤에 숨어 몰래 그레이스를 쳐다보기도 하고 현관을 오가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이 아이가 원하는 도움을 물어보진 않는다.


동병상련. 같은 아픔을 가졌을거라 예측되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 어느정도 자립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면 먼저 손내밀기 쉽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시간이나 비용적 측면을 떠나 가슴이 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약물로 방치하긴 했어도 그레이스가 엄마곁에 있길 원하고, 무엇보다 위탁기관이라는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훈훈'하기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레일린은 무턱대고 그레이스의 보모역할을 떠안는다. 레일린이 용기를 내긴 했지만 빌라에 사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덩치만 어른이 되었을 뿐 마음속에는 그레이스처럼 보호받거나 치유되어야 할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어린 그레이스를 통해 '키카 큰'사람들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보이는 과정이 과장되지 않고 시간에 흐름에 따라 조금씩 열린다. 초반에 입주자 한명이 갑자기 죽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는데 그의 이름은 후반부에도 다양한 이유로 계속 언급된다. 마치 그가 그레이스에게 베풀었던 온정이 그만큼 크고 값진 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이.


[흔들리고 있는 소녀를 보거든]의 이야기는 최근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학교에서 사라져버린 아이들 중 유사한 상황이 분명 있으리라 짐작될 만큼 현실적이다. 아이가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아이의 분명하고 큰 목소리를 귀찮아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의 말처럼 어른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몇 마디 말로 시간을 끌더라도 결국 되돌려 보낼 '엄마'의 부재가 성가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아이를 어디까지 돌봐야 할지도 고민인데다 그레이스의 엄마가 마치 자신의 아이를 빼앗겼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화를 감당할 여력이 없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한 사람이 돌봐야 할 때를 말한다. 빌라 전체가 그레이스를 위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기로 했을 때 무모하고 허술한 계획이었지만 가능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산없이 본능적으로 먼저 나섰던 레일린 덕분이기도 하다. 누가먼저인지도 중요하고 누군가 시작했을 때 동참할 수 있는 '키만 큰 어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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