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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남편의 바람을 견디며 묵묵하게 가정에 충실해온 여자가 어떤 계기를 통해 통쾌하게 복수하는 스토리는 뻔한데다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대리만족을 느낄 뿐 아니라 화려하게 변화는 비포&애프터의 스릴 또한 높아 가볍게 읽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다. [남은 생의 첫 날]도 그렇게 가볍게 읽고 싶은 마음에 첫 페이지를 넘겼고 초반까지는 내가 짐작했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힘들게 자식을 길러야 한다거나, 금전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닌 호화크루즈 여행으로 출발한다는 점도 대리만족보다는 또 하나의 '희망사항'처럼 보이기도 했다. 극을 이끌어가는 '마리'의 이야기가 이처럼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순간 우리가 진정 공감할 수 있는 두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오랜시간 결혼식도 없이 둘 만의 사랑으로 살아온 60대 '안느' 그리고 전신성형으로 아름다워졌지만 여전히 사랑에는 자신없는 '카밀'이다. 안느를 보면서 남여사이가 얼마나 쉽게 어긋날 수 있는지 반대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서로의 사소한 실수도 귀엽게 보일 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둘 중 누구하나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비밀이 생기는 순간 깊은 골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대방의 심리상태를 바로 알아차리고 도움을 주거나 기다려준다면 싸움으로 번지거나 결별의 수순을 밟지 않을 수 있지만 아무도 사랑이 진행중일 때는 이성적인 판단이 쉽지 않다. 안느의 경우가 딱 그랬다. 카밀또한 다이어트 때문에 시련을 겪거나 남자친구의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연의 쓴맛이 봤던 20대 여성이라면 공감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강한척하고 사랑에 자유로운 척 하지만 오히려 더 진실된 사랑을 원하고 한없이 여린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가 가지고 있는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에 안느와 카밀의 등장은 독자입장에서도 정말 다행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크루즈에 있는 석달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데 있다. 마리가 크루즈에 오른 것 부터가 너무 빠르게 과장된 점이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 머리가 어질어질 할 정도다. 마리의 경우 늘 해오던 뜨개질이 갑자기 대박이 나서 생계걱정을 단번에 해결한다던가, 엘르지를 통해 자신의 자유연애사가 온 세상에 알려졌는데도 하루이틀 괴로워하고(그나마도 크게 상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금새 회복하는 모습은 다행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했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고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고 해도 '혼자'서 잘살아가면 문제라도 있는걸까? 그나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느의 이야기만 어느정도 현실에 가까웠다. 소설의 힘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일, 일어나길 바라는 일을 이뤄주는 역할도 있지만 정도를 좀 넘어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역시 소설이구나.'하는 아쉬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마리나 카밀의 경우에 놓인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누군가는 희망의 새 길을 열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 큰 절망에 빠질 것 같다. '왜 난 뜨개질도 배워두지 않았을까?','난 왜 전신성형 할 돈도 모아두지 않았을까?'라고. 책에서라도 희망을 옅보고 싶은 사람이거나 조금 가볍지만 내용자체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잘 갖춘 소설을 원한다면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