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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빌라 - La Villa de Paris
윤진서 지음 / 달 / 2015년 5월
평점 :
윤진서 소설 [파리 빌라] La Villa Ed Paris
작가의 전작 에세이 [비브르 사 비]를 읽고서 다음 작품은 분명 여행에세이, 오로지 여행을 중심으로 쓴 특정[지역]의 낭만기라고 짐작했었다. 그때는 장기여행을 중단한지 꽤 오래된 상태라 그렇게 예상했던 거고, 여행에 다녀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그녀가 왜 에세이나 산문이 아니라 '소설'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것,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으면 싶었던 일, 아예 일어나면 안되었던 일등 자기가 했던 여행을 좀더 아름답고 소중한게 간직하기 위해 선택한 장치가 소설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왜 떠났는지는 생각할 필요없다. 작품속에서는 '실연'이 계기가 되었지만 세상에 많고 많은 여행자들 중 실연보다 더 많은 이유와 아예 이유없음 상태로 많이들 떠난다. 뭔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보다 비우기 위한 여행이 많고 소설 속 그녀도 여행을 통해 '인생의 축제'와 같았던 사랑을 보낼 수 있었다.
"상대가 모르는 걸 가끔 나도 모르는 거요." 13쪽
서른의 그녀는 다툼 후 횡하고 나가버린 남편을 두고 저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뜻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이 모르는 걸 알고 있어야 부부의 호흡이 잘 맞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상대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 이론적으로 보면 완벽한 부부의 모습이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 다면, 너무 꽉찬 상태보다 누군가 손길을 뻗을 수 있도록, 바람이 오갈 수 있도록 약간의 여유와 빈틈이 생긴다면 사랑도 그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유연해 질 수 있음을 그녀, '나'는 여행이 길어질 수록 깨닫게 된다. 그녀가 미처 말로 뱉을 수 없었던 인연들에 대해, 사랑을 생각하는 다른 관점에 대해서는 친구 '효정'이 대신한다. 빌라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반겨주는 이가 연인일 때도 행복하지만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이 전신을 차지해버릴 때는 오히려 '친구'가 열어주는 그 장소가 천국이 된다.
집에 돌아와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언제나 기쁘다. 다른 누군가의 집이건 나의 집이건 간에 그곳은 가장 아늑하고도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54쪽
계획없이 떠난 그녀의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인물들을 만나고 그 인물들이 말해주는 자신의 얼굴과, 삶을 전해듣는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얼굴, 가진게 없는 얼굴, 텅빈 얼굴은 얼핏 들으면 '재미없는 얼굴'이자 전혀 호기심이 일지 않는 얼굴일 수 있지만 욕망과 위선이 가득찬 세상에서는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수도 있고 아예 망가뜨릴 수도 있는 '무(無)'의 상태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가진 그녀라도 여행지에서 비포선라이즈에 나오는 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그녀가 그런일은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처럼 [파리 빌라]는 분명 소설이지만 그래서 낯설지가 않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치 책이 아니라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우리들의 몫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으쓱했다.
모두가 현재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모든 과거는 미래를 낳는다. 오늘의 나는 사라지고 내일은 또다른 내가 태어난다. 매일매일이 조금 다른 '나'일 것이다. 내일이 온다. 136쪽
'나'의 사랑은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식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상대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해서 떠나버린 것도 아니다. 어쩌면 상대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춰내서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적당한 비밀과, 적당한 무지가 공존해야만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하면 웃음이 많거나 눈물이 많거나 혹은 둘 모두의 상태가 되버린다. [파리 빌라]는 작가가 그동안 보여준 연기와는 정반대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격정적이지도 않고 순백에 가까운 여리여리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삶과 사랑, 그리고 서른 살의 적당한 어리석음과 아직 많이 남아있는 희망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읽었을 때 보다 돌아와서 다시 읽었을 때 더 좋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로 내 여행을 좌지우지 당하지 말고 내여행과 그녀의 여행이 어땠었는지 비교하며 반추해보고 거기에 약간의 상상을 덧붙여 완성시키는 조작된 추억이 더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