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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산티아고로 떠나라, 그녀처럼
이수아 지음 / 자연과인문 / 2015년 5월
평점 :
런던여행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행선지가 산티아고였다. 보통 한달 여정으로 떠나지만 짧게는 15일 전후로 일정을 조절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해놓고도 미련이 남았었다. 올 초부터 하루 10km걷기와 주말마다 20km전후로 걷기를 병행했던 것도 오로지 건강만을 위해서라기 보다 혹시나 떠나고 싶을 때 체력이 염려되어 가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마지막 아웃 일정을 스페인이 아닌 런던으로 했던 것은 비움을 위한 산티아고 행 이전에 학부시절 부터 꿈꿨던 '더블린'을 직접 보고와야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저자가 순례여정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블린을 경유했다고 하니 좀 더 유연하게 생각했어도 좋았겠구나 싶었다. 물론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그 선택의 후회도 없고 오히려 준비없이 산티아고로 떠났다면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무지였겠구나 싶었다. 무작정 걷는 것보다 최소한의 준비와 목적을 가졌을 때 비로소 산티아고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책, [사랑하면 산티아고로 떠나라, 그녀처럼]을 다 읽고서 든 결론이었다. 저자 이수아, 그녀는 왜 산티아고로 갔을까.
평생 독신으로 살거라 다짐했던 저자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남편 고든을 만나게 된다.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진 것은 부럽고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을 키워가는 그 시점, 고든이 피부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고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면서도 고든은 순례길을 떠난다. 어떤 기적을 바라고 떠난 것이 아니라 암환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떠난 그 여행을 고든이 하늘로 간 뒤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흔히 순례기나 여행기를 보면 길위에 적어놓은 메모 혹은 일지를 바탕으로 회상하며 쓰기마련인데 이 책은 달랐다. 바로 그 길위에서 쓴 그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길을 떠난 지 3일 째 되던 날이 첫 일지고, 그 다음날, 어떤 날은 걷고 난 뒤 숙소에서 바로 쓴 내용도 있다. 마치 책을 펼쳐 읽는 게 아니라 현재 여행중인 블로거의 포스팅을 접하는 생생함이 느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하면 다들 큰 시련과 상처를 껴안고 좀 더 단단해지기 위해 떠나기 마련인데 '사랑'을 위해 떠난 그녀 덕분에 회환이나 우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발에 상처가 생기고 아킬레스건이 당긴다고 고통을 호소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는 그 순간마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겸손함이 느껴졌다. 동행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처음으로 마셔봤다는 보카디요는 과연 어떤 맛일까? 싶으면서 꼭 산티아고 여정에 발을 딛는다면 마셔봐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길위에서는 누구나 오랜 벗처럼 느껴진다. 오로지 걷는 것 밖에 할일이 없고, 견디는 것이 전부인 그 여정은 타인의 이야기를 사심없이 들을 수 있는 좋은 대화의 장이 되기도 하고 동행이 없을 때는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속한 곳은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이다. 동양인 최초 첼리스트로 조금 거만할 것도 같은데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늘 웃고 곁에 있는 누구던지 그녀에게서 '사랑'이 느껴졌다. 흥미로운 것은 떠나는 목적자체가 희망을 품어서인지 길위에서 만나는 멋진 풍경과 동행자들과의 추억이 왠만한 고급 여행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이 여유로웠다.
오늘 밤에는 또 다른 아홉 사람을 위한 친교의 만찬이 있었다. 요리는 제이드와 죠지의 몫이었다. 와인은 넘쳐났고 우리의 만찬은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77쪽
하지만 걷고 또 걷는 여정이 늘 파티로만 가득찰 수는 없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기전 여유롭게 걷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 그녀는 뒤에서 다른 이들을 쫓아야 했고 때로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식당에 찾아가 하룻밤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었다. 순례길의 날씨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변화무쌍해서 비가 오기도 하고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추워질 때도 있고 뙤약볕에 노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부분을 적어가는 날에도 그녀는 긍정적이었다. 비를 많이 맞았지만 숙소를 잘 만나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거나 하는 부분을 감추지 않았다. 구토로 인해 아에 일정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는 친구들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고 그 순간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즐겨야 했다. 음악은 나를 즐겁게 했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중략-그것은 나로 하여금 음악에 맞춰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226쪽-
고든과의 만남이 우연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순례여행을 시작한 날도 우연처럼 고든과의 1주년 결혼 기념일이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추억과 그가 미처 마치지 못한 모금활동을 위해 길위에 올라섰지만 그녀 스스로 표현하기를 자신에게 '환골탈태'가 일어났다고 할 만큼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얻고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순례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은 파울로 코엘로의 '순례'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산티아고에 다녀왔어도 참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역시나 처음 든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준비없이, 목적없이 떠났다면 그녀처럼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무엇을 얻고 무엇을 비울 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번역된 언어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과감없이 써내려간 그녀의 순례여정은 그동안 읽었던 산티아고 여행기 중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깨닫기 위해서가 아닌 사랑을 위해 떠날 수도 있는 순례길,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그녀의 일지는 일말의 두려움으로 망설이고 있는 예비 순례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