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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앨리스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책 보다 영화로 먼저 만났던 스틸 앨리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언어학 교수 앨리스의 이야기로 스틸의 의미가 'steal'이 아니라 'still'이었다. 기존에 우리가 알츠하이머 관련 문학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접했을 때 환자들은 매일 무언가 하나씩 혹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어가는'것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이다. 때문에 잃어버린다는 부정적인 측면보다 자신이 앨리스고 앨리스가 가지고 있는 주변상황을 인식하도록 매 순간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이 많이 보여진다. 물론 접근법이 달라진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내 일일 드라마에서도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잠자는 엄마 곁에서 한참동안 울기만 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스틸 앨리스에서는 엄마랑 학교 문제로 의견이 갈렸던 막내 딸 리디아와의 접점을 많이 다룬다. 사고치고 속썩이는 자식이야말로 아픈 손가락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동서양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삶 속에서 제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자식이 늘 아픈법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없는 것, 그 아이를 앞으로 기억하지 못할까봐 앨리스는 괴로워한다. 마치 그토록 괴로운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백그라운드가 화려했던 건지도 모른다. 일류대학의 종신교수, 남편도 같은 교수인데다 사랑으로 늘 감싸안아주며 막내를 빼고 첫째와 둘째 또한 엄친아로 자라주었다. 상황이 화려할 수록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는 우리에게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안도감을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나서 소설을 읽었던 까닭에 이미 머릿속에 앨리스와 다른 인물들이 모습들이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저 영화만 봤더라면 앨리스 역할을 맡은 무어의 연기가 뭐 그리 대단했을까 싶었겠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화를 보고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항기 가득한 리디아의 모습도 책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존이 떠나고 앨리스와 리디아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은 분명 활자를 보면서도 한참을 멍하게 읽고 또 읽었다. 머릿속에 배우들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냥 딸과 엄마가 함께 걸어가는 그 장면마저도 감정이 일었다. 영화를 볼 때는 울지 않았는데 오히려 책을 보면서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속에서 연설장면이 그리 아프지 않았는데 책의 문장으로 읽어가면서는 결국 울음이 쏟아졌다.
지난날들 중 어떤 날을 기억하고 어떤 날을 지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알츠하이머란 병에 타협이란 없습니다. 354쪽
알츠하이머 진단이 내려졌을 때 앨리스는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독한 치료를 견디며 좀 더 이 세상에 남아있을지, 아니면 남은시간을 가족들과 하루하루 소중하게 보낼지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제한적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암이 알츠하이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경학을 전공한 저자의 연구를 통해 작품은 환자 본인에게 집중되고 그들이 겪을 외로움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그저 울리기만 하던 작품들과 달리 가족의 역할과 삶 그자체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준 [스틸 앨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