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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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삶의 교사가 아니고요. 아직은 그렇게 되기에는 어리고 미숙하지요. 책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좋은 책은 상투적 사고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는 것 말이지요."

 

위의 글은 본문이 아니라 부록에 실린 인터뷰집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일전에 읽었던 스토아 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강조했던 부분과 상통하는 부분이라 읽는 순간 리뷰의 중심을 '반 상투적 사고를 위한 예술'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미주의 선언의 저자 문광훈 교수도, 에픽테토스도 결국 책을 읽기 전 후가 같다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심미주의 선언을 읽고 어떻게 달라졌을까?

문교수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더 긍정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정작 그 예술이 우리사회 혹은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헤아려보면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심미주의라는 말 뒤에 '선언'이라고 강하게 말한 까닭이다. 책을 읽고 사고가 변화하지 않은 것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마음의 경도가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결국 독서도, 예술감상도 의미가 없게 된다.

 

푸코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그리고 공재의 <행장>까지 논평한 후 이 조선시대 선비의 <자화상>에 이르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중략- 자기배려/자기돌봄/자기형성의 문제가 더 이상 논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술작품과의 구체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가 논의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 237쪽-

 

예술을 접하고 삶의 녹여내지 못하고 학습을 통해 '지식'의 하나로 예술을 대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예술에 '관한'지식은 해박할 지 몰라도 결국 '예술가'가 결코 될 수는 없다. 심미적 경험에는 여러개가 있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서정적 모음곡을 다룬 파트에서 마음이 동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결국 자기애에 빠져있거나 자기비애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패로서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등 음악가 말고도 학부시절 제임스 조이스를 접하면서 알게 된 '에피파니'나 이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발터 벤야민의 '세속적 계시'가 삶에서 느껴지는 시적 순간이자 앞서 말한 내가 느끼는 예술적 순간이기도 하다.

 

제목이나 책의 두께를 보면 전공서적처럼 무서워보일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두꺼운 책은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들이 말하는 '두껍고 두려운'범주에서 빼줘야 할 것 같다. 저자 스스로 어려운 말로 교란시키는 것이 미학이나 심미가 아니라 쉽게 접해서 삶의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 만큼 이 책은 어렵지만 쉽다. 쉽지만 사례로 든 작품이나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재밌기까지 하다. 더이상 예술의 정의와 역사만 붙들고 머리아프다고 투정부릴게 아니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찾던 '심미'가 이 책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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