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열 아홉에서 스무살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던 그 겨울, 처음 전혜린을 알게 되었다. 그 이름을 알고부터는 내가 어디에 존재하던 내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즘 누구나 그이름을 알고 조심스레 결심하듯 나또한 서른에는 나의 자유의지로 삶을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런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을까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책, 오후 세시, 그곳으로부터에 실린 전혜린편을 읽고서야 내가 왜 기억을 잃었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후 세 시, 그곳으로 부터는 저자 최예선이 서울 이곳저곳에 남겨진 혹은 이제 완벽하게 물리적으로는 사라졌고 추억으로만 기억되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쫓는 '예술산보'의 결과물이었다.

 

예술가란, 예술이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하며

그 시대를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란게 별거 없다싶지만 그 전에 예술가들은 시대의 불안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존재라고 표현한 것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시대의 불안속에 몸과 맘이 뒤틀리기보다는 그저 숨고 모른척 외면하며 살아가는 나는 그래서 서른에 죽지못했었고 예술가일 수가 없었던게 아닌가 싶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예술가들의 입장이 되어 그시절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되어 가상의 글을 적어놓기도 한다. 대게는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여자로 태어난 까닭에 아무래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여성예술가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때문에 최초의 서양미술을 배우고 미국과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나혜석편을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활동을 할 때 공연한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결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걸맞게 그녀가 이혼을 한 이후 마치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 제로가 된 듯 그녀의 마지막 전시회에서 그림은 단 한점도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학을 다녀오고 열렸던 귀국전시회에서는 5천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던 그녀의 전시회가 그토록 초라해진 이유는 오직 그녀가 '이혼녀'가 되었을 뿐 오히려 예술적인 영감은 마음의 상처와 원숙함을 더한 이후였을텐데도 말이다. 나혜석이 여자를 위한 미술학사를 열었던 그장소는 이제 사라지고 미술관이 새로 들어서있다고 한다. 책에는 현재 남아잇는 곳들에 대한 추억보다 이미 사라지고 자취를 감춘 장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한켠이 쓸쓸해졌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덜한편이다. 서울의 아픔과 어두움을 강하게 어필한 기형도 시인의 마지막 장소가 된 피카디리 극장과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내용은 더욱더  참혹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그 다음해에 열린 88서울올림픽. 미처 제대로 잡히기도 전에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색 비둘기가 날아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2장이 애도가 주제인 까닭에 슬펐어도 그만큼 마음이 가장 오랜시간 머물며 지난 날을 반추하기에 좋았다. 만약 슬픔보다 구보씨처럼 혹은 박완서처럼 그저 추억의 장소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사라진 장소가 아닌 실존하는 장소를 거닐고픈 이들에게는 1장이나 3장을 권하고 싶다.

 

오후 세 시, 저자는 서울에 남겨진 예술가들의 흔적을 쫓아 예술산보를 했다. 30여년전 기형도는 그 무렵 오후 4시에는 중앙일보 기자실에서 노트를 꺼내어 문학인이 되어 시를 적었다.  혹은 약속도 없이 무작정 학림다방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전혜린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한동안 오후 세시의 나라는 책을 읽고 그날 그날의 소소한 풍경을 블로그에 포스팅을 했더랬다. 이제 곧 찾아올 오후 세시 혹은 네시즘의 나는 무엇을 하게될런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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