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최인호. 라는 이름만으로도 작품을 고를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는 저자의 애착이 듬뿍 담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그로 인해 선뜻 한번에 읽어내진 않을거라고 어리석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편안한 오후에 그보다 더 아늑한 카페에서 차한잔 마시며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독서라고 오해받아도 상관없었을 만큼 흥분되는 소설이었다. 뿐인가. 이미 작품을 읽고 난 유명작가들의 평도 그런 허세가 가득한 독서행위를 한 껏 고조시켰다. 문제는 뜻하지 않게 잠이 오지 않은 그것도 영 석연치 않은 악몽도 아닌 꿈을 꾸고 뒤척임을 멈추고 일어난 새벽에 읽어서 였다. 아직 꿈에 대한 찝찝함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읽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종교적인 문제나 신화적 배경이나 인간이 가지게 되는 뫼비우스 띠의 고리를 순환하는 어리석음이나 괴로움을 마주하기에는 지나치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K. 평범한 샐러리맨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가 토요일 아침 7시를 알리는 자명종을 시작으로 어제의 자신과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가 느낀것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낯설음이었다. 낯익음은 동시에 낯설음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국 '진짜' 혹은 '제대로 잘 알고 지내는'그런 사람앞에는 낯익다거나 낯설다거나 하는 표현은 거리가 먼 까닭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실상 난 그놈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 까지 이렇게 그냥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직접적으로 말해주길 바랐다. 차라리 세탁소에서 단잠을 자고 눈뜨지 않고 이야기가 끝나거나 다시금 월요일 아침 7시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렸을 때, 익숙하게 스킨을 꺼냈을 때 그 스킨의 브랜드가 제발이지 'V'이길 이야기속의 K보다 더 바랐던 것이다. 통속적인 소설이어도 좋았다. 답답하진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저자는 이제 막 글을 쓰는 신출내기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전까지의 집필 방식을 또 한번 되집어 놓는 제3막을 여는 빠른 호흡으로 써내려간 처녀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결코 그렇게 가뿐하게 K의 망상이나 꿈이었다고 독자를 가볍게 놔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독자인 나 역시 계속 답답해 하고 있을 수 도 없다. 천천히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K의 낯설은 혹은 낯익은 세상을 떠올려본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사는 동안 내가 아니거나 혹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제와 다르거나 좀전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떤 계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데 외상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간단하게는 내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할 잔인한 복수를 꾀하고 있을 때, 잔인한 말들과 잔혹한 영상으로 뇌의 전부를 사용하고 있을 때 내가 미쳤나 보다. 그런 상상을 하기전의 나는 이미 해버린 나와는 더는 같을 수 없나보다. 순수는 끝난건가. 하는 정도다. K처럼 도플겡어를 맞딱드리고 그로 인해 죽음을 암시하는 뭐 그정도는 아니다. 이따금 지인들이 어디선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마주치고 내게 확인을 원했을 때 조차 섬뜩하지 않았던 일들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덕분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정녕 그들이 마주쳤던건 나2 혹은 나3 였던 것일까.

 

독실하지 않은 그저 익숙해진 습관처럼 성당을 다니는 K. 굳이 따지자면 사랑도 아니었던 엄마와의 추억의 연장인 그의 종교적 믿음은 내가 만나는 대다수의 교회를 출석하거나 휴가 때 절을 찾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절대적인 믿음보다 오히려 가볍고 질척이지 않아 더 좋다. 집착하지 않기에 그들은 종교를 종교로 볼 수 있고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늘 하던 버릇과 습관에 익숙함을 느끼고 안도하는 K의 스킨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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