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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어두운 방에서 @eulyoo
브라이언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어린 시절 살았던 아일랜드의 집과 그곳에 놓여 있던 물건들, 어머니의 병과 죽음, 아버지와 나눈 대화와 함께 들었던 음악 등을 따라 기억을 더듬어가는 책이다. 하나의 기억은 다른 기억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 철학자나 작가들의 문장이 놓인다. 어머니가 필사한 성경 구절과 아버지가 쓰던 크리스털 재떨이처럼 사소한 사물들 사이에서 한때의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던 아버지와의 대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자신이 했던 행동,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일. 집을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을 확인하려는 듯 홀로 빈집 곳곳을 둘러보았던 순간까지. 기억은 그렇게 구체적인 장면과 사물들을 거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무리를 해서라도 루르드에 가려 했던 이유가 병자들에게 기적을 안겨준다는 루르드의 성모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헤아려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기억은 그 자체로 일종의 공간이다. 그 안에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뿐 아니라 차라리 잊고 싶은 기억까지, 꼭 필요하기도 쓸모없기도 한 온갖 사무들이 무더기로 쌓이거나 감추어져 있다.23쪽
자신의 이야기를 곧장 꺼내기보다 다른 이들의 문장을 빌려 돌아가기도 하고, 기억의 한 귀퉁이를 더듬다가 문득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 지금에 와서야 무엇을 이해하게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기억을 다루는 글의 형식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더욱 깊게 만든다.
▌마침내 이 성경책은 나에게 익숙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떠오릴게 해 준다. 저녁에 차분히 앉아, 전보다 느린 속도로, 자신의 구원이 되었을지 모를 구절들을 옮겨 적던 모습을.139쪽
사라져버린 기억들, 그것은 결국 장소와 사물을 너머 ‘사람’,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순간들을 돌아보면서도 그 시절을 뒤늦은 후회로만 채우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는 사람의 시선과 그 기억을 바라보는 지금의 시선이 겹쳐지면서, 지나간 시간은 쉽게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필사한 성경 구절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전에 묵상했던 말씀들이 생각났고, 어쩌면 자신의 고통에서 비롯되었을 나의 어머니의 성경 필사도 함께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성경 구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견디기 위한 간절한 문장이었을 것이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그것을 적어 내려간 사람의 시간과 마음까지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아직 건강하게 곁에 있는데도 본가에 갈 때마다 한 권 한 권 가져왔던 엄마의 성경필사 노트, 다이어리를 꺼내보았다. 엄마는 내가 가져가려 할 때마다 여러가지 감정을 보이곤 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뒤늦은 후회와 미안함보다 이렇게 펼쳐 볼 수 있는 물성을 가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우리가 고집스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증거일 뿐이다.375쪽
읽는 동안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조용히 일었다. 오래전의 장면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기보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억의 먼지가 빛 속에서 잠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들을 붙잡으려 몇 번이고 손을 뻗게 되지만, 막상 손안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기억 속에 남은 사람들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뒤늦게나마 머물러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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