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표준어 바깥에서 -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소수자가 바꾼 쓰기의 역사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6년 9월
평점 :
✏️#표준어바깥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표준어 바깥에서>를 읽고 나면 글쓰기란 절실한 곳에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글을 쓸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문자권력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기록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문자권력’이라는 말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다. 과거에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 자체가 권력이었다. 누구나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성과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애초에 허락되지 않거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그런 경계 바깥에서 글을 썼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문학이란 처음부터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절실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전쟁에서 손을 다치고, 전쟁 노예로 붙잡히고, 가난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집필한 대작 돈키호테로 인정받긴 했지만 가난과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위대한 작품과 그 작품을 쓴 사람의 비참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 놀라웠다. 작품의 명성은 작가의 삶까지 보상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위대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면에는 정작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한 인간의 삶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익숙한 마크 트웨인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도 새롭게 다가왔다. 문학은 개인의 상상력과 재능을 증명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부당함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어빈 웰시의 『트레인스포팅』에 대한 설명 역시 인상적이었다. 약물과 파격적인 소재 때문에 그저 자극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작품이, 사실은 대처 시대 이후 산업이 무너지고 노동의 미래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청년들의 삶을 보여주는 사회풍자라는 점이 놀라웠다. 한 개인의 파괴적인 모습 뒤에는 그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조건이 있다. 문학은 바로 그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저자의 말에 가장 깊이 공감하게 된 인물은 마이아 에켈뢰브였다.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바닥을 청소하며 살아가면서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던 사람.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들을 떠올렸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좀 더 잘 쓸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어쩌면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결과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얼지 않도록 뜨개질과 코바느질을 했다.(...)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린 종이에 몰래 글을 쓰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무실을 청소했다. 233쪽
에켈뢰브의 삶은 그런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글쓰기는 무언가 대단한 영광을 얻기 위해 시작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내 안에 쌓인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든 밖으로 꺼내놓아야 해서 쓰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남의 문장을 흉내 내고 이미 인정받은 글의 형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 글은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것이어야 한다. 서툴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써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의 출발점일 것이다.
<표준어 바깥에서>는 문학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책인 동시에,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건네는 하나의 권유다. 언젠가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의 나를 통과한 생각들을 지금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 글쓰기의 자격을 바깥에서 구하지 않는 것. 문자권력의 바깥에서 시작된 수많은 글이 문학의 역사를 바꾸었듯, 나 역시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기 전에 내 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다. 글은 특별한 사람에게 허락된 권리가 아니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시작하는 일이다. #박홍규 #틈새의시간 @timeofgap_p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