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통역사
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 푸른숲 / 2026년 6월
평점 :
나의 통역사 / 리 랑그바드
한국 가족들은 덴마크 가족들에 비해 서로 숨기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어떤 가족이든 비밀은 있어. 서로에게 비밀이 없다면, 그건 진짜 가족이 아니야. 167쪽
위의 문장은 책 <나의 통역사> 뒷표지에도 실려 있는 내용으로 이 책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자 통역사의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저자는 언어가 서로 다르고,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더라도 설사 입양이란 프리즘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형제자매가 결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자인 ‘나’는 어릴 때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로 덴마크로 입양되었다. 책의 내용 전반에 페미니즘과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채식주의자> 등이 등장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했던 차별과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내게는 여성의 차별, 여전히 한국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동성애 문제보다는 앞서 언급한 ‘한 형제라도 결코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더 마음이 갔다. 동시에 같은 언어를 배우고 설사 통역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어떤 배경에서 나고 자라고 성별에 따라 전달되는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나는 분명 아버지가 북한에서 오셨다고 들었어.
(…)
아마 그 사람이 착각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지?
아버지 고향이 북쪽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걸 북한이라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 286쪽
이 부분이 그저 단순한 오역의 문제라고만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북쪽이라는 단어는 방위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함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전 통역자가 이를 단순히 북쪽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가 전쟁, 두고온 형제 등을 언급했던 것을 종합했을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의 연인이었던 이전 통역사가 가족들과 나의 말을 그대로 전하기보다는 의역해서 전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가족으로부터’ ‘나’를 눈치(눈치는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뒤로 물리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 148쪽)’ 빠른 사람으로 생각케하는 것 역시 두 사람의 연대 혹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맨 처음 발췌문으로 돌아가보면 ‘서로에게 비밀이 없다면, 그건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말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의 역할일 수도 있지만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게 될 것을 염려해서 하는 ‘배려’라고 느껴졌다.
입양인은 사실 입양을 취소할 수도 있어.(…)
응, 입양인과 양부모가 서로 동의하면 가능해. (…)
나는 입양인이든 아이든, 누구에가나 부모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169쪽
나는 가끔 친가족에게 애인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입양인들이 부럽기도 해.(…)
친가족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일 수도 있어. 친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면서, 그걸 알고 싶어하는 입양인도 많잖아. 202쪽
입양인이며 레즈비언이자 작가인 ‘나’를 통해 이야기는 흘러가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위의 발췌문을 보더라도 자신의 아픔과 과거에 갇힌 ‘나’를 반복적으로 손을 내밀어 밖으로 꺼내주는 역할을 통역사가 하고 있다. 통역사의 역할은 거듭 반복하지만 언어가 가진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외에도 ‘나’와 ‘독자’가 빠질 수 있는 오해와 오역으로부터 구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누구보다 잘 전달해주던 통역사이자 전 여자친구는 먼저 이별을 고하고 떠나버린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 가족과 완벽하게 단절되는가 싶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때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큰언니와의 오해를 풀게 되는 건 결국 통역사의 도움이 아닌 ‘나’와 ‘가족’과의 애정이었다. 결국 이 책은 언어 너머에 있는 침묵과 서로의 교감의 역할도 이토록 솔직하게 그리고 어느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이런 책을 만난다는 것은 언어와 관계 그리고 거의 언급하진 않았지만 ‘차별’과 ‘존중’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주었다. @prunsoop #나의통역사 #리랑그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