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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포인트 - 그저 행동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올바른 말을 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혜진 옮김, 배세진 해제 / 우중몽 / 2026년 5월
평점 :
슬라보예 지젝, 《제로 포인트》 완독 리뷰
어둠 속의 사람들을 보기 위하여
> 그리고 어떤 이들은 어둠 속에 있다
> 그리고 어떤 이들은 빛 속에 있다
> 하지만 당신은 빛 속에 있는 이들만 본다
>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보지 못한다
—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마지막 대사
슬라보예 지젝의 《제로 포인트》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 브레히트의 문장이었다. 지젝은 책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제대로 말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2부에서 다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그 질문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젝은 이 갈등을 선악의 대결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의 점령 정책과 정착민 폭력을 비판하는 동시에,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과 민간인 학살 역시 명확히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한쪽의 폭력을 다른 쪽의 폭력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편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상황을 정확하게 명명하는 일이다. 특히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암울한 상황을 두고 하마스의 공격을 비판하는 것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존엄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민간인을 향한 테러가 정당화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진영 논리는 이러한 복합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지젝은 오히려 그 불편한 긴장 속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행동하라“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젝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한다. 사실이 정보의 나열이라면 진실은 그 사실들을 가능하게 만든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다. 그래서 그는 성급한 실천보다 먼저 현실을 왜곡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연설을 둘러싼 논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강조한 것은 특정 진영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어떤 비극도 침묵 속에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제로 포인트‘ 역시 여기서 의미를 얻는다. 지젝이 말하는 제로 포인트는 단순한 위기 상황이 아니다. 기존의 정치적 언어와 도덕적 좌표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말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역사적 임계점이다. 트럼프 시대의 포퓰리즘, 기술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불안,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활, 그리고 전쟁의 확산은 모두 그러한 징후들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건을 소비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개념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지젝은 정신분석학과 철학, 정치이론을 넘나들며 이러한 단절된 현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현대 사회의 혼란을 단순한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더 강한 정체성과 더 단순한 답을 원한다. 포퓰리즘과 전통주의가 힘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젝은 그러한 회귀가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중이 기억하는 지젝은 종종 아이러니하고 난해한 사상가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지적 성실함에 가깝다. 그는 어느 한쪽에 안주하기보다 모두가 불편해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제로 포인트》는 결국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언어에 대한 책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묻는 책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왜 ’제로 포인트‘인지,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도 어떻게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책을 덮고 나서도 브레히트의 문장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말하려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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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joos_story 진행으로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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