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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페트라 펠리니 지음, 전은경 옮김 / 북파머스 / 2025년 8월
평점 :

“할아버지, 이해하실 거예요, 안 그래요? 할아버지의 하루도 힘들 때가 많잖아요.” 나는 그에게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속속들이 이야기한다. 이런 말을 해도 후베르트는 여전히 느긋하다. 그에게는 뭐든 감출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똑같으니까.
페트라 펠리니의 소설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죽고 싶은 열 여섯 소녀 린다와 삶도 죽음의 선택조차 불가능 한 치매 노인 후베르트와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이런 간단한 소개글만 보고 린다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현실을 제대로 수용하게 된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독자가 마주한 후베르트의 상태는 그녀에게 그런 삶의 의욕을 하나하나 전달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린다의 유일한 친구 케빈은 환경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점점 더 세상의 종말을 확신하고 말도 웃음도 사라져간다. 누군가에게 한없는 애정을 가진 사람이 생을 포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보다 당장의 수학 성적과 불안정했던 과거와 평가가 전부인 세상을 놓아버릴 수도 있으리란 불안한 마음도 완벽하게 놓을 순 없었다. 야스퍼스의 말처럼 자살의 원인은 한 두가지의 동기로 설명할 수 없고, 특히나 유가족들이 ‘내가 만약 그때, ~했더라면’이란 자책과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고 말한다. 완전한 침묵속에 수행되는 행위를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시끄럽죠.” 내가 말한다. “너무 너무 시끄러워요.” 그러고 귀를 막는다. 인생은 보통 너무 시끄럽다. 치매에 걸리지 않아도 그렇다. 고함, 개 짖는 소리, 엔진 소리. 조용하면 귀를 기울이게 된다. 평소와 너무 다르니까.
꽤 오랜 시간 이동중에 음악을 듣지 않았다. 소설 속 에바처럼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무의미한 숏츠를 넘겨가며 그보다도 더 무의미한 소음으로 부터 도망치곤 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세상에는 큰 소리로 자신을 알리려는 사람이 많고, 그게 맞는 것처럼 돌아가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조용할 때, 그래서 귀를 기울 일때 들리는 것 같다. 후베르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스스로를 ‘질문요원’이라 하면서도 린다는 끊임없이 후베르트에게 말을 건다. 아주 작은 변화나 떨림, 온기가 생기길 기대하며 건네는 그녀의 말들이 케빈에게도 전해졌다면 어땠을까.
“인생은 선물이야.” 에바가 말한다.
“그건 논쟁의 여지가 있어요.”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거실 벽에 기댄다. 이곳에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든다.
아주 오래 전,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의 ‘소풍’을 알게 된 후, 내 삶이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꽤 오랜 시간 린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었다. 인생은 선물도 아니고, 선물이 아니었으므로 결코 소풍이 될 수도 없었다. 린다에게 후베르트와 에바, 케빈과 엄마 그리고 아우디와의 만남이 있었던 것처럼 내 삶에도 사람들과 만남이 존재한다. 만약 그런 사람들과 만남이 없어서 힘들까봐 세상에 책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것, 시를 노래하는 것 모두 후베르트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는 린다를 혹은 에바를 그리고 고양이와 강아지들을 보내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린다 할머니의 말처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신비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라는 말을 서로 나눠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