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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 ㅣ 꿈꾸는돌 45
김지현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평점 :
#유자는없어

"네가 왜 유자야?"
(...)
"니는 같은 반인데 아직 내 이름도 모르나."
"아니, 알아. 너 유지안이잖아."
"그래. 성이 유씨니까 유자."
전학생이 아아, 학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한테 유자 향이라도 나는 줄 알았어." 48쪽
성이 유씨이자, 유자빵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으로 인해 소설 속 화자인 '나' 유지안은 지안이라는 이름 대신에 '유자'라고 불린다. 또 같은 반 김해민은 중학생 때 전학왔지만 고1이 된 지금도 여전히 이름이 아닌 '전학생'으로 불리고 있다.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뿐인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이름이 아닌 '유자'와 '전학생'으로 불리는 두 사람과 유자의 절친이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를 점점 결석하고 있는 '수영'이 등장한다. 수영은 별명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두 사람과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학원폭력이나 청소년 대상 범죄와 같은 내용은 없지만 충분히 공감할 만한 고민들을 다뤘다.
거가대교를 통해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바다를 지나도록 만든 터널이 있었다. 남들은 바닷속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만 오가는 터널인데, 나는 그곳을 지나는 상상만 해도 귀가 먹먹해졌다.
게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도 전부터 선택지 하나를 박탈당하고 시작하는 느낌.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까?
61쪽
소설의 배경이 거제도인데 어쩌다보니 태어나서 한 번도 못가본 곳이라 너튜브로 거제도 풍경과 음악을 검색해서 파도소리를 들었다. 이런 내 모습을 소설 속 유자가 보았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낯설게 볼 수 있는 것, 심지어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음'에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유자는 거제가 불편하다. 하지만 거제와 이웃한 부산으로 넘어가고픈 마음은 공황으로 인해 쉽사리 그녀를 먼곳으로 나갈 기회를 희망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고 해도 유자의 바람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 그것도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바람을 말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도, 자신의 배경과 환경 모두를 부정하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100명이 안되는 작은 학교에서 유자는 전교 1등이었다. 학교에서는 유자라는 별명과 동시에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이 줄곧 그녀의 '본질'을 가로막고 있었다.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 19등을 했을 때, 석차 자체로는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왜 괴로울 수 밖에 없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 그것이 유자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도 전교 1등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그 정체성이 없었다면 이번 석차는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받아들였을 거다. 내가 모래중 전교 1등 유지안이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87쪽
자신을 부정하는 삶이란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안으로는 점점 더 피폐해질 뿐이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꾼다고 부정하려고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는다. 결국 방법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인지를 상실한 우매한 대중의 말들이 결코 사실도, 진실도, 확정된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부터 인정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쓰다 보니 알겠떤데? 남들은 저 팀 망했다. 망했다. 그러는데 진짜 망한 건 아니더라고. 내가 대사 한 줄도 못 쓰게 된다면 그땐 정말 자포자기 망한 거겠지. 근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 148쪽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는 유자와 전학생 그리고 수영처럼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현실에 맞지 않거나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불가능해진 꿈들을 정리하지 못해 방황하는 꼴이 그들보다 더 어리숙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세 사람과 혜현 언니의 상황에 더 잘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나를 지우고 싶은 간절함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당장 바꿀 수 있는 건 바꿔야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유자는 없어'를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나라서 좋은 이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