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임 화가 첫 에세이. 색채 환상곡🎨

기호와 문자로 소통되는 언어의 영역과 시각과 감성을 통해 전달되는 감동의 파장에 관해 고려해 볼 때, 본인에게 색채란 전통의 틀에 고정된 구조의 극복이자 나아가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색을 고르는 일이란 즐거움인 동시에 억제되었던 욕구의 해방이다. 72쪽

하태임 화가의 『색채 환상곡』은 작가 이전에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시각적 아름다움 너머에서 오랜 시간 컬러 밴드를 반복해 그려온 이유와 그 반복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를 그녀의 작업노트와 여러 인터뷰와 전시관련 글을 통해 들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의 작품을 이전부터 좋아했으면서도 그녀의 작업을 ‘하나의 색 위에 또 다른 색을 덧입히는 참으로 고단한 작업’으로만 오해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착각과 무지를 하나씩 짚어내며, 색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의 말처럼, 하나의 색이 지니는 의미는 각자가 살아온 기억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흔히 블루를 우울의 색이라 부르지만, 저자에게 블루는 오히려 따뜻한 색이다. 핑크 또한 소녀적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화해와 관용의 색으로 확장된다. 그 대목을 읽으며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내게 블루는 어떤 기억의 색이었는지, 핑크는 어떤 시절을 통과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색을 더하는 그 사이사이의 틈새 시간에 책을 읽고 사유를 이어간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 그녀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나의 생각을 끼워 넣는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의 딸로서 살아가며 겹겹이 쌓아온 감정들이 색처럼 겹쳐진다.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았지만, 첫 스승이자 멘토였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더 선명한 딸이기에,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저자처럼 그 관계가 변함없이 이어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애틋하게 호출되는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Green to green.
색을 지칭하는 단어는 너무도 한정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린과 당신이 생각하는 그린은 수많은 경험과 기억의 차이들이 중첩되어 있다.
젤 좋아하는 색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아직도 연두색이라고 말한다. 99쪽

문장을 읽으며 색이란 결국 삶의 요약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방식이 이미 칠해진 색을 다른 색으로 ‘지우는 것’처럼 느꼈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 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 있어 살아온 시간 속에서 생긴 얼룩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얹으며 조금씩 다른 화면으로 나아가는 일. 지운다는 말이 은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색 위에 색이 놓이며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실존적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책 속 여러 장면 중 언급하고픈 또 다른 이야기는 오로라 여행에 관한 것이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독자라면 반색할 만한 내용일텐데 내가 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기대했던 장엄한 오로라를 마주하지 못했을 때의 저자의 태도였다.

까칠한 그녀는 오늘도 내게 등을 돌렸다. 구름 너머 어딘가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그녀. 나는 오늘도 그 존재를 믿는다. 눈에 담지 못한 장면은 마음에 새긴다. 그렇게 나는, 오로라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이곳을 떠난다. 147쪽

보지 못했음에도 믿고,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품고 가는 방식. 책을 읽으며 느낀 저자의 담대함은 단순히 ‘쿨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간, 완전히 방전되었을 때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방식, 그리고 끝내 자신이 정한 방향을 품고 가는 태도까지. 그 모든 장면이 나를 오래 흔들었다. 특히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끝내 해내는 단단함까지! 덕분에 내가 가진 색과 방식으로 때로는 지우고 쌓아가면서 조금씩 완성되는 중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주서평단 #색채환상곡 #하태임 #프로방스 @hataeim

★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프로방스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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