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로 가야겠다
도종환 지음 / 열림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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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고요로 가야겠다


시인의 시는 이월 부터다.

허나 지금이 12월 겨울을 맞이했으니 뒤로 한참을 넘겨 현재를 찾는다. 

임의접속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부터 책은, 언제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언제라도 갈 수 있었으니까.


꽃으로 화창하던 날 교만하지 않았고

찬 바람 몰아치는 날 비굴하지 않았다

오늘 담담할 수 있어야 

내일 당당할 수 있다

  • 겨울 벚나무 중 일부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담담할 수 없어서, 여전히 당당하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을 읽을 때면 성서를 읽을 때보다 더 마음이 서글프다. 오래 전 ‘시인이란, 누군가 해야만 하는 말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할 말은 없지만 듣고 싶었던 말들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서글픈 말이지만 분명 듣고픈 말이었다. 달리 말하면 시집을 읽고 당장 이 순간만이라도 담담하려 애쓰면 당당한 순간을 언제고 한 번은 맞이할거란 기대가 들기 때문이다.


겨울 하늘 오래 바라본다

눈앞의 들끓는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수 있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 겨울 오후 중 일부


10여년 전,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이 무렵이면 어느 때 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버려야 할 것’에 대해 묵상한다. 시인과 달리 나는 이미 그 답을 알면서도 여전히 부여잡고선 ‘놓지를 못하겠어요. 허나 주님 뜻대로 마시고, 제가 알아서 잘 놓을 수 있게 시간을 좀 더 주세요.’ 하기를 매해 반복한다. 주님 뜻대로가 아닌 내 뜻대로. 그래놓고선 늘 같은 원망을 쏟아낸다. ‘왜 저에게만 이러세요.’


바람이 분다

사무치게 분다


이렇게밖에 못해서 미안하다


너를 몸부림치게 해서 미안하다


  • 바람이 분다 전문


바람이 왜 내게만 불지 않느냐고 여름에는 투정부리고, 겨울이면 왜 내게만 불어오는 것 같냐고, 그것도 황사가 부냐고 또 원망을 늘어놓는다. 헌데 시인은, 시인은 ‘이렇게밖에 못해서 미안’하단다. 시인은 내가 듣고 싶은 말대신 들어야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인가부다.


시집 안쪽에 시인의 서명이 적혀있다.

이월에도 다시 펴 보라고, 그리고 ‘우리도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하며 달래주려는 손길이 마냥 헛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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