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배우다 - 소소한 일상에서, 사람의 온기에서, 시인의 농담에서, 개정판
전영애 지음 / 청림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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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여백서원 #괴테마을 #청림출판

작가 헤벨이 주는 정답은 이렇다. 천사가 당신에게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줄 경우 답해야 할 첫째 소원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 둘째 소원은 무얼 빌어야 할지 물어서 알게 된 그 소원을 비는 것. 마지막으로 빌어야 할 세 번째 소원이 중요한데, 바로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34쪽

전영애 교수의 <인생을 배우다> 서평의 시작을 어떻게 적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최근에 종방한 드라마에서 다룬 이야기자, 연말 산타 할아버지가 생각도 나길래 소원과 관련된 발췌문으로 시작했다. 소원. 사실 내게는 소원이 단 하나이거나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밤새 떠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때로는 허무하고 허망했다. 전영애 교수님의 여백서원과 관련된 다큐를 몇 년 전(이라고는 해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TV에서 알게 된 후 저자의 저작(역서를 포함)을 찾아 읽었다. 지인 중에는 교수의 책을 정말 맘에 들어하는 분들도 계셨다. 참 순수한 분이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지를 아는 분이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내게 주어진 삶의 고비고비를 넘다보니 잊혔다가 지난 주 개정판으로 다시 <인생을 배우다>를 마주했다. 개정판이라고 하면 많은 부분 수정하거나 새로이 추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더 좋았다. 세월이 흘러 자꾸 수정되는 이야기는 애초에 이야기에 감흥받은 독자들에게 왠지모를 서운함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책을 읽었으나 세월이 흘러 읽는 내가 그때와 다르지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 제법 많았다. 그때는 저자를 보며 롤모델 혹은 닮고 싶은 부분이 많았었는데 이번에 깨달은 것은 ‘감사함의 중요’ 였다.

“문학은 사람을 만듭니다.”
유럽에서 어떤 국가적 차원의 문화정책이나 발전된 문화 시설보다도 더 부러운 것이 그런 여유들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그런 교양 시민층이다. 그것은 물론 사회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또한 그런 개인들의 여유가 사회의 여유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44쪽

개인에게 여유가 있으려면 사회차원에서 안녕과 안정을 보장해줘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연 그런것들이 보장된다고 개인의 노력없이 교양 시민이 되는 것일까 하면 그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와 같은 나눔의 삶이 가능한 이유가 내게는 개개인이 가지는 ‘감사’에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나라 안팎에서 연구하는 삶은 누군가에겐 말도 못하게 부러운 환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녀가 자주 오해받았던 것처럼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감사함과 기회를 나누기 위해 애쓰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녀가 들려주는 어려운 날들의 이야기 속에도 누군가를 향한 ‘날선 비난, 혹은 분노’ 보다 배려와 충만한 베풂에 감사하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그런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차분해지고 겸손해질 수 있었는지. 특히 제자들이 낸 문집을 언급하며 비춰지지 않은 수많은 빛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연 어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비난하거나 힐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가치있고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노력은 그에 비해 얼마나 하였는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런 화사함 속에서도 지인들의 부고와 그에 대한 애도도 적잖케 섞여 있다. 11월은 가톨릭 교회에서 ‘위령 성월’이다. 죽은 모든 이를 애도하는 이 11월에 이 책을 읽고 차분하게 마음을 다독여본다. 아직 살아 남은 이들에게는 분명 헤야할 일들도 함께 남아있을 것이다. 저자가 여백서원을 짓게 된 배경과 과정을 읽으며 죽은 이와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을 찾아올 이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그의 ‘일’이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내게 주어진 날들과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다음의 문장으로 마무리 해본다.

도시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이 와서 조금 숨을 돌릴 수 있는 여백과도 같은 공간은 그렇게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오해’되어도 참 좋은, 실은 남을 ‘여’자가 아니라 같을 ‘여’를 쓰는 여백서원이다. 여백은, 아버지의 호이다.(…)
‘여백을 위하여’는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뜻도 있지만 이름 그대로 흰빛처럼 맑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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