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작 - 박인기책상머리에 두고 열심히 눈으로 풀꽃을 익혀 두려 했다. 그런데 야생에서 그 풀꽃들을 만나면 여전히 생소했다. 책에 있던 그 이름과 사진으로 보았던 식물의 형태가 내 머리에 쏙쏙 떠올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건 그림이나 사진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야생의 자리로 나가지 않고 꽃의 모습만 기억해 두려는 내게 잘못이 있다. 4쪽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언어의 생태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사람 마음의 생태를 잘 이해하는 데서 말의 참모습과 소통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또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 생태를 아는 데서 ‘사회적 언어’를 배워 사회적으로 성숙한다. - 5쪽애매모호함에 대한 너그러움의 자세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와 상통한다.19쪽“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에 나오는 이 말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65쪽저자는 ‘모르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 혹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기’를 각각 다른 챕터에서 이야기한다. 얼핏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듯 보이지만 ‘언어의 의미’를 헤아려가며 찬찬히 다시 읽게 되면 이 두 챕터가 동일한 맥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요즘 사회는 ‘모른다’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아는 것만이, 그리하여 알기 때문에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에는 애매모호한 것이 많기 때문에 지나친 확신에 의해 무언가를 결정하고 말하기 보다는 찬찬히 ‘그럴수도 있지’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말하기를 권한다. 그렇게 되면 무리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말하기’는 태도 혹은 습관을 자제할 수 있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언어의 의미를 사유하며 ‘다시 한 번 그 산을 오르게’된다.비판이 ‘의미 있는 실천’이 되려면 비판도 그 끝판이 중요하다. 우리들 개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비판 행위의 끝판은 대개 두 가지 양태이다. 하나는 그 비판에서 ‘나’는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판에서 ‘나’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89쪽누군가를 비판할 때 ‘너’만 있다면 어떨까. 이따금 이전 세대들의 이야기가 피곤해지고 회피하고 싶은 까닭이 그들의 비판속에 ‘나’가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때는 안그랬는데…’로 퉁쳐지는 그 수많은 비판은 안타깝게도 대를 이어 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어른’들의 공통점을 살펴보게 된다. 진정한 어른들의 말은 어떠한가. 그들의 비판은 ‘ 그 자체가 현실적 선택과 책무를’(91쪽) 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원래 짐작의 짐이 ’술 따를 짐‘이고, 작도 ’술 따를 작‘이다. 짐작은 순전히 술 따르는 행위에서 생겨난 말이다. 남의 잔에 술을 따를 때, 헤아려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잔의 크기도 헤아려야 하고, 따를 술의 양도 헤아려야 한다. 145쪽짐작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를 보면서 그동안 짐작이란 단어를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흔하게 혹은 별 생각없이 사용했던 단어에 ’배려‘와 가까운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추리소설이나 영화에서 ’짐작가는 것에 대해 말해보라‘고 추궁하던 장면들을 밀어내고 차분히 누군가를 떠올리며 ’짐작‘하는 모습으로 채울 수 있었다.‘강력한 자아’나 ‘순정한 자아’를 보이려는 것이 도를 넘으면 글쓰기의 미덕은 사라진다. 나를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의 덫일 수도 있다는 점을 놓치면, 글쓰기의 미덕은커녕 글쓰기의 악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221-222쪽말살이를 제대로 하는 것만큼 글을 ‘잘’쓰는 것도 배움이 필요하다. 여기서 배움이란 문법 혹은 문학적 기교를 배운다기 보다는 위의 발췌문에서 처럼 ‘정도’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책을 읽은 후 기억을 위해 혹은 타인과 좋은 책을 나누고자 하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으나 때로는 비문에 가까운 타인의 글들을 굳이 끼어넣는 경우도 있다. 마치 대상 책과 인용문 양쪽 모두를 체화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란 흔치 않으며 ‘도’를 넘어선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침묵 배우기’를 넣어야 한다며 글을 맺었다.#짐작 #박인기 #말살이 #언어 #독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