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 밖으로 나와 학교를 돌아봤다. 모든 게 낯설게 보였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 30쪽도망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할까. 온통 어둠뿐인 세상은 가능할까. 책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듯 읽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질문으로 바뀐다. ‘그랬구나’하고 수긍하기에는 안타깝고 ‘도와줄래’라고 말하기에는 작품 속 인물과 나와의 세상이 다르다. 그런데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은 괜찮은가요?’<나의 어린 어둠>은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의 저자 조승리의 첫 소설이다. ‘첫’이란 단어는 몇 가지 장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이라는 말로 퉁쳐지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문학적으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다고 말할 수 없지만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네 편의 연작과 한 편의 에세이가 잘 어우러지는데다 한 편 한 편 따로 읽어도 좋았다. 저자의 에세이를 읽었지만 굳이 등장하는 인물을 그녀와 동일시하진 않았다. 동일시 해야할 건 내 자신이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상대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상대의 불행을 은근히 반기게 되는 악하지만 악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마음. 서운한 마음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도 남을 ‘손맛’ 가득한 음식들. 실제로 책을 읽다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부침개로 털어내는 장면에서는 식당에 들어가 부침개를 주문해서 먹기도 했다. 갓 부쳐낸 호박 부침개는 바삭하며 뜨겁고 고소했다. 한 조각을 집어 남동생 입에 넣어주고 큰 조각을 집어 가스불 앞에 서 있는 엄마한테 쫓아갔다. 154쪽물론 그 맛이 날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았다. 소설에서 여기저기 배달을 가야할 만큼 넉넉하게 부쳐진 부침개가 내 입에도 살포시 와준 듯한 그런 따뜻함이 조승리 작가의 글에서 느껴져서 에세이에 이어 소설까지 이렇게 연달아 읽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부침개 추억을 떠올리면 엄마의 부침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부침개를 부쳐주면 너무 빠르게 집어먹는 내게 ‘맨 처음 부친 부침개를 먹으면 결혼을 늦게한다’는 말을 매번 하셨는데 빈말은 아니었는지 나와 형제 모두 마흔 직전에 결혼을 했다. 영 근거 없는 말이 아닌 것이 첫 장을 저 혼자 급하게 먹는 다는 것은 타인의 배려가 부족한 것이니 그런 사람이 자신뿐 아니라 배우자와 함께 나누고 배려하는 결혼생활을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야 젊은 나이에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며 배려를 배우고, 인내를 어느 정도 길렀을 때 결혼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조승리 작가의 글이 좋았던 또다른 이유는 음식 이야기의 분위기를 지속시켜 비유하면 자장면과 짬뽕을 동시에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화끈하게 슬프고, 몸이 녹아내릴 만큼 달큰함이 한 권의 책에 다 들어있다. “왜 나만 이 꼴로 살아야 해. 왜 나만.”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너무 억울해. 다 죽어버려.”내 안의 새카만 어둠이 긑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 모두가 지옥에 빠지길 바랐다. 44쪽첫사랑은 시력을 결코 완전히 잃고 말거란 ‘나’의 고백에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이 깨지는 순간 상대에 대한 원망 뿐 아니라 자신을 원망하고 세상 사람 모두가 다 등을 돌린 듯 느껴진다. 이유는 다 다를테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거나 멸망을 잠시나마 바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입밖으로 쏟아낸 저주스러운 말은 잊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만큼 독하고 서늘하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분출된 카타르시스가 다시금 살아갈 힘이 되어주고, 그렇게 살다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일, 때로는 감당하기 벅찬 기쁨도 찾아온다. 다만 저자가 다녔던 특수학교의 다른 이들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지 또 다시 의문이 생긴다. 속옷을 잘 챙겨입지 않았던 그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타인에게 자식을 부탁하면서도 교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가정으로 돌아갔을 그 아이는 또 어떻게 살고 있을지 닿지도 않는 걱정과 물음을 내려놓지도 못한다.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는 저자의 바람이 사라지지 않고 어둠을 조금씩 거둬들이는 데 잘 쓰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