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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천둥 같은 소리와 쿵 소리가 또 났다. 목구멍에서도 느껴질 만큼 묵직한 소리였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의 흔들림이 뒷간의 한쪽 귀퉁이를 집어삼켜 한줄기 희망 같은 강렬한 아침 햇살을 불러들였다. 137쪽
3주 동안 책을 읽었다. 한 번에 읽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아이가 잠든 뒤 스탠드를 켜고 읽었다. 더 읽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속도를 조절해가며 읽었다. 책의 제목이 '이름 없는' 여자가 '여덟 가지'나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데 그 흐름을 맞춰주고 싶었다. 작품 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책의 내용은 제목처럼, 위에 발췌한 문장들처럼 양가적이었다. 이름이 없다 해놓고 여러가지 인생을 살아야 했고, 이름이 없어 부고를 낼 필요도 없는 사람이 부고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이 아이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살아서 성장하게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좋고 내게 당신이 원하는 다른 어떤 비극을 줘도 좋아요. 내 다리를 앗아 가도 좋고, 내 눈을 앗아 가도 좋고, 심지어 내가 간 뒤에 이 아이가 정상적으로 살 거라고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요. -중략-
미희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밤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그녀가 읊조렸던 것이 자신의 첫 번째 기도라는 사실이었다.317-318쪽
수많은 감시와 오해를 견뎌내며 살아온 그녀가 노년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청하기도 전에 털어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간중간 시점이 이동하듯 이름과 삶의 달라질 때에도 이 하나의 질문을 놓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답을 '엄마'라는 이름 아닌 이름을 부여 받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나의 사고와 시선이 이전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모성애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이가 삶의 중심'임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던 여자라는 전제에서 그렇다. 이 이름은 다른 이름과 달리 강제적인 듯 보이지만 강제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 의지'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이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는동안 묵할머니 처럼 여러 나라를 이동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땅, 흙도 마찬가지다. '흙으로 돌아갈 때'가 된 그녀가 자신이 현재 머물러 있는 땅의 흙을 먹는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소설을 읽기 전 저자의 이력만 보고도 흥미로웠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써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소설'처럼 느껴져서다. 한편으로는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애초에 떠올랐던 단어가 모국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언어를 다듬는 과정이 마치 지나치게 과잉되는 감정을 다스리는 과정이었지 않았을까. 여자들이 살기 위해 뛰어야 만 했던 상황에서 '한줄기 희망 같은 아침 햇살'의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여자.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묵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읽어야 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