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평점 :
#문명 #소요서가 #예술 #과학 #철학 #인간
문명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 공포입니다. 25쪽
1969년 영국 BBC에서 방영되었던 내용을 2017년 단행본으로 엮은 뒤 2017 다시 개정된 판본을 번역한 이 책은 서문만 읽어봐도 저자 케네스 클라크가 여러가지 염려되는 부분을 안고서 집필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저자소개를 잠시 하자면 마치 히어로물이나 스릴러물에 등장할 법한 이력, ‘역대 최연소인 30세의 나이에 내셔널갤러리 관장으로 발탁‘(얼마나 소설같은 일인지 전공자들은 공감할 만한)되었으며, 옥스퍼드 교수로 있었고, 이 책의 기반이 된 다큐멘터리 <문명>을 제작한 이후 종신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저자소개만 읽고서도 이 책은 무조건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문명의 적에 대해 묻고는 그 답이 다름아닌 공포라고 대꾸한다.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공포를 느낄만한 상황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다. 그런 맥락에서보자면 그들은 분명 완벽한 문명사회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원하는 문명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적의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닌 적을 인지하고 고통을 느끼며 예술(혹은 문학)의 힘을 아는 상태여야한다.
문명인이라면 적어도 공간과 시간의 양면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고, 자신이 지나온 곳과 나아갈 길을 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읽고 쓰는 능력은 이를 위한 아주 편리한 도구이지요. 40쪽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지고 단순히 매뉴얼만 읽고 보고서 작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삶이 과연 문명인의 삶일까하는 것에 대답은 굳이 적지 않겠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제 본격적인 문명, 즉 예술적 맥락안에서 들여다보면 서구사회에서는 기독교를 제외시키고는 설명되지 못한다. (동양에 대한 부분이 빠진 것은 저자 서문에 밝힌 것처럼 언어를 알지 못하면서 문화를 안다고 할 수 없기 대문이다). 기독교 미술을 수강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즉 빛으로 표명도는 절대자의 전능의 시작을 이 책에서도 잘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쉬제르가 교회 건축에서 첨두아치만이 아니라 채광창과 트리포리움 같은 여러 높은 창의 채광까지 포함해서 고딕 양식을 도입했다고, 아니 사실상 발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빛이 충만한 거룩한 건물은 찬란하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로써 이후 2백 년 동안 행해진 온갖 건축의 대계획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79쪽
쉬제르가 창안한 장미창은 명동성당에만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장미는 성모마리아를 상징하고, 명동성당의 주보성인이 바로 ‘무염시태마리아‘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을 알고 다시 미사를 마치고 장미창을 바라보면 이전에 수업에서 의미를 알았을 때보다 더 큰 감명으로 바라보게 된다. 책에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책을 읽으면서 여러차례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초기 기독교사회에서 그다지 관심받지 않았던 성모마리아가 어떻게 주요 인물과 순명의 상징으로 성당 곳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포괄적인 세계의 여러 종교, 인간 존재의 모든 부분에 파고드는 이집트, 인도, 중국 등의 여러 종교는 여성 중심의 창조원리를 적어도 남성 중심의 그것과 동등하게 중시했습니다. 244쪽
이후 등장하는 네덜란드 사회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재능‘과 관련지어 램브란트의 예술관을 만나게 된다. 종교적 신념을 가졌던 그였지만 오래전 아벨라르와 마찬가지로 보다 과학적인 증명을 원했고, 17세기 사람들에게 있어 수학은 사람들에게 칭송은 물론 ‘당시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의 종교‘(276쪽) 이기도 했다. 사담이지만 데카르트의 경우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친구들의 방문에도 누워서 ˝생각하고 있네˝(278쪽)라고 답했다는 부분은 누구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 얘기라고 놀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이성과 경험이 예술사에 미친 내용을 읽다보면 당연하게도 인간에 의해 꽃피워진 문명이 탐욕으로 인해 어떻게 퇴색될 수 있는지도 볼 수 있다. 종교에서 멀어진 인간이 다음 경의의 대상으로 자연을 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연을 경외하는 이들의 시구절을 볼 때면 그 자리에 신 혹은 연인을 대입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과 클라크가 언급한 것처럼 후대역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역시 성공적으로 부흥할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1810년 무렵에는 앞서 18세기에 사람들이 품었던 온갖 낙천적인 희망이 결국 거짓이었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인권, 과학의 발전, 산업의 혜택 등 모든 것이 망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혁명으로 얻은 갖가지 자유는 곧 반혁명, 혹은 혁명정부를 장악한 군인 독재자가 박탈했습니다. 412쪽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고야의 <5월 3일>을 오래 전 고야전에서 본 기억이 났다. 또 책을 읽는동안 관람했던 <빅브라더 블록체인> 전시작품 중 조승호 작가의 <은신처>와 김혜미 판화가의 <피난처>를 연결지어 보게 되었다. 전시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작품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 두 작품의 사전적 의미를 잠시 언급하자면, 전자는 몸을 숨기는 곳이고 후자 역시 고통이나 전쟁등으로 인한 외적인 것으로부터 피해 숨는 곳이다. 은신처는 망루와 같은 높은 곳에 설치하고 감시당하거나 감시를 하는 양쪽 모두를 아우르고 있고, 피난처는 ‘내면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이자 처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작가 인터뷰에서 발췌)으로 책에서 말하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작품 자체가 예술가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난처로 가변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숭배에 이어 빛, 인상주의로 이어져오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비슷한 시기에 존 버거는 클라크와 마찬가지로 TV를 통해 이야기를 펼쳤는데 훨씬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고, 문화와 예술을 둘러싼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실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였다. (역자 후기 중)
비슷한 시기에 아는 분도 존 버거의 책을 추천했던터라 의도치 않게 이 두 책을 다 읽는데다 앞서 나열한 전시 중 어느 한 편도 제대로 감상을 적지 못했다. 그러니 서평을 적으면서도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글을 남겨도 되는 것인지 자문도 해봤다. 하지만 역자의 말처럼 클라크가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는 대신 ‘문명이 아닌 것‘에 이야기하면서도 구체적인 인물과 건축, 그리고 작품등을 통해 보여준것처럼 나또한 어설프게나마 내가 이해한 바를, 내가 보았던 것들에 기대어 적었다고 믿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