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호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2
마리 르도네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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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는 여태껏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하긴 쥐 탓도 아닌 것이, 야영지에 쓰레기를 버려 썩게 한 공사판 사람들 잘못이다.
152쪽

소설 <장엄호텔>를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지금보다 수십년전, 늪 주변에 들어선 호텔의 모습은 음침하고 우울한 기운만 느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호텔을 물려받고, 호텔의 운영권과 함께 두 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삶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유쾌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대로 연기를 배운 적도 없는데다 엄마와 함께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호텔에서만 머물던 사람보다 더 갇힌 삶을 산 것 같은 폐쇄적인 성격은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에 적당한 선을 두고 지켜보는 이들에게만큼은 호의적이다.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동생의 수고 덕에 청소도, 빨래도 심지어 아다의 병간호까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삶은 그럭저럭 동생에 비하면 괜찮아 보였다. 짙은데다 꽤 오랜시간을 공들여야 괜찮아보이는 병색이 짙은 아다 역시 맘대로 부릴 수 있는 막내가 있어 그나마 괜찮은 듯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늪의 냄새가 호텔에 더 번질수록 두 자매 뿐 아니라 장기간 투숙하던 공사 인부들마저 병들어 떠나버린다. 글에는 유머러스함도 없고 일말의따스한 인간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루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늘은 사람들이 배수구 때문에 불평을 하고, 어차피 빚은 여전하고 이렇다할 희망사항도 없지만 살아가는 것, 불평사항이 줄지도 늘지도,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것이 생겨나도 그랬다. 역자의 후기를 읽지 않아도 서두에 발췌한 문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팬데믹 시대,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였다. 특정한 누구에 대한 원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평화로운 삶도 아닌 지금, 나 또한 이 소설의 화자처럼 그렇게 약간의 불편과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 같은 짐들의 무게를 견딘다는 느낌도 없이 견뎌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벌써 조금은 잊혔다. 나도 기억력이 나쁜가보다. 풀이 무덤을 덮기 시작한다. 호텔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참 좋다. 멀리 호텔이 보인다. 159쪽

독자의 시선으로 보면 호텔은 부동의 짐이자 삶의 시작이며끝이다.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말이 참이라면 화자에게 십자가는 호텔 그 자체였을 것이다. 늪은 한 번 삼키면 제스스로 결코 토해내지 않는다. 누군가 잡아당기려 해도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화자에게 가족이 늪과 같았는지, 아니면 호텔이 그러했는지 독자인 나는 명확하게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엄호텔에 머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출할 때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언제 벗을 수 있을까 했던 불편함이 이제는 마스크에 색을 입히고 디자인을 변형하는 듯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화자가 장엄호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처럼 그렇게. 소설의 담담한 문체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과 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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