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기도가 될 때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수녀 지음 / 파람북 / 202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장요세파 수녀의 <그림이 기도가 될 때>는 그림을 통한 묵상이 담겨있는 책이다. 수녀님이 계신 곳은 봉쇄수녀원으로새벽 3시 30분에 기상, 저녁 8시까지 기도, 독서와 노동으로 채운다고 한다. 그토록 거룩한 곳에서 읽고 쓰는 행위가 지속된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과 그림이라는 추억의 매개가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다. 물론 제목에 드러나듯 종교적인 부분이 강하지만 자신의 양심과 명상의 방법으로 이 책을 읽어도 좋은 이유를 감상에 더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가 익히 아는 화가들의 작품이 자주 등장 해 학교에서 배운 내용,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제발로 전시회에 찾아가 마주한 그림의 감상은 같을 수도 있지만 좀 더 벅차거나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이란 작품을 노동 후에 감사와 고뇌가 담긴 숭고한 작품으로 배웠다면 사실 부부 앞에 놓인 농작물은 죽은 아기였다고 한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작품의 실제 이야기는 충격이며 애끓음그 자체였다.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일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통의 승화를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내게 참된 부모와 스승이야 말로 매일 매일 고통을 승화하여 자녀와 제자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가하면 뭉크의 <절규>는 어떤가. 지독한 어지러움과 소리마저 삼킨 절망이 두 귀를 막아버리게 만든 것 같은 이 작품을 보고 저자는 놀라운 해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절망을 뒤집어보면, 이렇듯 깊디깊은 절망은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려낼 수 없지 않을까요?
81쪽


크게 절망할 수 있는 것이 결국 희망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에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의 절망을 생각해본다. 찬란했던 순간을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울고 불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을 찾기란 너무 어렵다. 이에 저자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절망이라고 강조한다.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작품은 미소년이 물에 비친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과 밖의 다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추한 모습도 결국 내 모습이며 이를 억지로 떼어내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 아닌가라며 이야기한다. 추함의 역사와 현재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외적 혹은 내적 추함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평소에 묵주기도를 통해 자주 접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코로나시대의 사회적거리두기로 이전과 같은 대면만남이 어려울 때 필요한 단상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신실한 믿음으로 견뎌낸다지만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와 수군거림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리아가 임신 하기에는 이미 나이든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마찬가지로 임신은 하였지만 남편 즈키르야의 침묵과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그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마리아의 소식 또한 큰 위로와 응원이 되었을 것이다. 두 여성의 만남은 ‘복받은 이‘라는 신에 대한 감사로 채워진다. 개인의 노력이나 저 혼자 받은 축복이라는 교만이 아닌 겸손과 감사의 나눔만 가득한 만남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분명 이 작품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으리라. 이외에도 읽는 동안 나의 잠재된 폭력성, 억울하다는 심정의 참모습을 깨닫는 등 알지 못하거나 못본 척 했던 나를 맞 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그림을 배워온 정보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감상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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