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파랑, 어쨌든 찬란
케이시 맥퀴스턴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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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런 캐릭터들을 잘안다. 알렉스와 헨리는 사랑스러운 책벌레의 면면한 전통에서 튀어나온 캐릭터들, 우리가 잘 알고 기억하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일 테고 그래서 책벌레인 나는 그들이 예쁘다.
473쪽


케이시 맥퀴스턴의 <빨강, 파랑 어쨌든 찬란>의 원제는 Red, White and Royal blue˝로 미국 첫 여성대통령의 아들 알렉스와 영국 왕세손 헨리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아들과 세손이라면?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과한 연애장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은 스킵하면 그만이고 이 두 사람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 아웅다웅, 경멸을 오가다가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돌발 연애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이게 지루한것이 아니라 너무 오랜만이라 즐거웠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줄곧 등장하지만 팬픽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뻔한 소설이 주는 흥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열패밀리의 동성애나 대통령 아들이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 하는 일은 그냥 생각해봐도 단순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알렉스의 엄마는 올해 재선을 두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아들된 입장에서 자신의 연애가 편할리가 없다. 성인남녀가 연애를 하는데에도 이런저런 고난과 어려움, 오해와 다툼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들켜서도 안되는 관계라면 그것이 긴장감을 더해 사랑을 돈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온갖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는 왜 ‘왕실의 자손일까?, ‘나는 왜 대통령의 아들일까?‘라는 태생적인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이 받은 모든 혜택이 멍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서두에 언급한 내용은 역자의 후기에서 발췌했는데 알렉스와 헨리외에도 알렉스의 누나인 준과 두 사람의 절친 노라 등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모습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노력과 열정에 기인한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두고 울고불고 운명을 저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그리고 서로 도와가며 해결해간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지금껏 소설에서 보아온 바로 그 방식이라는 점이 고루함과 동시에 묘한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 모든 장치가 어차피 허구와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자면 책을 읽는 그 시간동안은 그야말로 ‘말도안되는‘상황에 즐겁에 미쳐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되면 말이 되니까 도움이 될테고, 말이 안되는 상상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너드 이면서 몹시 잘생기고, 몹시 흐트러져있으면서도죽을만큼 매력적인 인물들을 간만에 다시 만나니 나는 후자측면에서 충분히 즐거웠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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