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라는 말이 이전에도 자주 언급되었었나 싶을만큼 요즘은 아이돌 노래가사에도 ‘광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만큼 팬데믹 시대에 비대면으로도 충분히 소통하는 듯 하지만결국 우리 모두 혼자라는 외로움과 싸우며 광야 한복판에 서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규현 목사의 <광야, 창조의 시간>은 광야라는 것이 반드시 지리적인 장소를 뜻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스스로 용기를내어 광야에 들어가 주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겨 본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원하지도 않았는데 광야에 던져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목사는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혼자일 수 있는 그 시간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기회이며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만히 있다‘란 ‘잠잠히 있다‘라는 뜻이다. 자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죽여야 한다. 욕망이 다그치는 아우성을 잠재워야 한다. 욕망이 들끓는 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147쪽

홀로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는데 그것이 너무 괴로워 일부러 혼잡한 사람들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쓸때가 있다. 문제는 그렇게 걸어들어간 사람들 틈에서 여전히 외롭다고 느낄 뿐 아니라 자신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며 경청은 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목사는 민낯을 두려워 하지말고 주님앞에서 그대로 내보이며 약한 것을 고백하고 잘못한 것은 용서를 구하며 철저하게 비움으로써 채우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다 비우고 나면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더이상 틈이 없을 만큼 완벽한 채움,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고 싶은 허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아 숭배적 교만은 암 덩어리와 같다. 사람들이 상처를 잘 받는 이유는 병적인 자존심 때문이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깊은 열등감에 허우적거린다. 235쪽
다른 사람들의 좋은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응원하며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면 분명 그것은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신앙생활의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해 성서모임을 갖고 종교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활동하는 것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이롭다. 하지만 주님과 완벽하게 함께할 수 있고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다름아닌 철저하게 혼자있을 수 있는 광야에서만이 가능하다. 혼자 잘 있을 수 있을 때 부부가 되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에 있어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크게 와닿았던 부분은 광야라는 곳은 단순히 힘들어서 광야가 아니고, 빨리 탈출하고 싶다고 애원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무엇보다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결국 다시 광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기 전 내 삶은 왜이렇게 광야의 반복인가 싶었는데 아직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원하시는 모습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내 멋대로 도망치거나 다른 것에 눈을 돌려 마치 광야를 모르는 척, 잊은 척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혼자라는 기분에 지독하게 외롭고 힘겨운가. 광야가 자꾸 반복된다고 느끼거나 신앙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스스로 헛된 것인 줄 알면서도 우상이나 중독현상을 보이고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질 때, 바로 그때를 기다리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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