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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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좀 더 간결하게 이 책을 정리하고자 하면 책의 뒷표지에 적힌 다음의 내용을 기준으로 읽으면 좋다.


지젝과 함께 읽는 포스트코로나

마스크를 쓰지 않을 권리와 코로나바이러스 음모론
생산수단을 휴대하는 노동자와 노동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기업
체계적인 인종차별과 그에 맞서는 광범위한 항의 시위
비대면 사회를 지향하는 ‘스크린 뉴딜 정책‘과 삶의 디지털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프로젝트‘와 포스트휴먼의 미래
두려움보다 심각한 피로감, 그리고 정신건강의 위기

위의 내용을 토대로 했을 때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스크를 쓰는 것이 심각한 자유침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에 더나아가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가 언론과 의료진에 의해 듣고 있는 상황만큼 심각하지 않다라고 보는 견해로 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코로나 확진 이후에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차안에서 창문을 내려 자신의 건재를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두번째 생산수단을 휴대하는 노동자와 노동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기업이란 과거 탄광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사고발생시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안전모 착용을 스스로 거부했는데 안전모 구입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코로나를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대책이라고 했을 때 마스크 품귀현상을 떠올릴 수 있다. 당장 생업을 위해 일터로 나가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비로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유럽의 북부에서는 수확해야 할 양이 늘어 썩어가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집단감염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세번째, 이런 팬데믹 시대에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위를 곱게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팬데믹 이전에도 교통혼잡 등을 이유로 직간접적 피해를 역으로 호소하며 시위를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비대면시대에 시위는 정신나간 행위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지젝은 말한다. 코로나가 하찮게 여겨질만큼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있고, 팬데믹은 오히려 이를 겉으로 들어나게 하는 촉발제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우리는 또한 팬데믹이 서로 다른 계급(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충격이 크다)과 인종(미국에서는 흑인과 라틴계가 훨씬 더 고통을 겪는다)과 성(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에 어떻게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지.... -중략- 특히 전쟁, 빈곤, 굶주림, 국지적 폭력 등으로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아서 팬데믹이 사소한 악의 하나로 취급되는 나라들도 항상 유념해야 한다. 158쪽

경제적으로 부족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팬데믹을 관망하거나 오히려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삼지 못한 서민이자 여성인 내게 팬데믹은 지젝의 지적처럼 초기에는 비대면으로 인해 공동체 활동보다 개인 활동에 치중하는 잠시 멈추는 시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확진자의 수가 급증한 요즘 가정보육이 너무나 당연히 되고 그로 인해 불거지는 불편은 여성인 내가 오롯이 감수해야한다. 물론 이런 불편함은 앞서 언급한 인종과 지역으로 인해 차별받는 이들에 비하자면 어쨌거나 내게는 팬데믹이 커다란 이슈이니 불평할 만한 상황은 못될 것이다.

네번째, 비대면 사회를 지향하는 ‘스크린 뉴딜 정책‘과 삶의 디지털화란 사람들의 외출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런 경우 배달하는 운전자와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이 보는 스크린에 의해 우리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혜택을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프로젝트‘와 연결지으면 그가 말하는대로 우리가 언어로 소통할 필요없이 이미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으로 지젝의 경고처럼 이런 시스템이 가동된다면 우리의 머릿속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고 그렇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예로 들은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을 두고 우리가 당연하게 ‘빨간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행위가 결국 사기업의 이익경제 구도에 현혹된 채 파란약을 빨간약으로 착각하고 복용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려움보다 심각한 피로감으로 인한 정신건강의 위기에서 지젝은 대타자를 언급한다. 팬데믹 시대에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을 더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이상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퇴근길에 선술집에 들르는 것, 동네 친구를 만나 가볍게 수다를 떠는 것 모두가 감염을 확산시키는 행위로 간주되는 지금 우리는 지금 이시기를 어떻게 거쳐가야 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 전에 읽었던 아트스피치 김미경 대표의 <리부트>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이란 부분이었다. 만약 여전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팬데믹 시대의 종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철학적 사유를 하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변화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우리가 시스템 내에서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 열린다. 이것이 너무나 ‘급진적‘인 주장으로 느껴진다면,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가 비록 정반대의 의미이긴 하지만 이미 변화하고 있음을 상기해보라. 151-2쪽

사실 지젝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이 책을 접했지만 나조차 팬데믹 시대를 단순하게 시간이 흐르고 나와 너를 포함, 사회전체가 일시적으로 조금 불편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팬데믹 시대는 누구의 말처럼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주장처럼 자본주의의 폐해를 직시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혹은 모두일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사유했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볼 수 있다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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