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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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 작가의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를 읽으면서 지난 2월에 감상했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떠올렸다. 남편이 될 사람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보내야하는 여성의 삶도 그렇지만 제대로된 그림을 배우고 싶어도 배우거나 클래스를 여는 것이 남성화가에 비해 수월하지 않았던 화가 마리안느의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된 베르트 모리조와 메리 카사트는 여성이 접하는 일상들을 그려냈다. 동시대의 남성화가들이 야외로 나가 풍경을 담을 때 집안에 갇힌 그녀들이 그릴 수 있는 소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많지 않았을 뿐 그들이 붓을 다루는 예술적 능력마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카사트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대신 여성들을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존재로 품위 있게 표현했다.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들은 마치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그린 종교화의 구도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카사트가 육아를 여자라면 누구나 쉽게 해내는 그림자 노동으로 보지 않고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음을 드러낸다. 99쪽



베르트 모리조의 <요람>이나 메리 카사트의 <푸른 암페어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작품을 보면 여성이라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그릴 수 있는 작품처럼 다가왔다. 여성혐오자였던 드가의 도움을 받을 만큼 카사트의 실력은 당시에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카사트의 경우는 이후에도 주로 아이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소재가 그것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육아에 숭고함을 그림으로 살려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최고의 삽화가 였던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소와 소재의 제약 뿐 아니라 메리안의 경우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메리안이 관심을 둔 것은 자연, 그중에서도 꽃과 곤충들이었다. 메리안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를 떠올렸다. 가정폭력으로 모두가 떠난 오두막에 홀로 남아 자연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던 카야의 모습이 메리안과 정말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665년, 메리안은 열여덟 살에 의붓아버지 제자인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와 결혼했는데 그는 술주정뱅이인 데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메리안은 남편 대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수의 도안을 그려 팔았고, 양피지와 리넨에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다행히 그녀의 그림은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164쪽


마지막으로 소개할 화가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다. 그녀의 이야기를 접할 때는 비극적 삶과 사실적 묘사로 잘 알려진 프리다칼로를 떠올렸다. 모더존 베커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또 그 경험을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 그자체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면 프리다 칼로는 한 평생 자신의 아이를 원했으나 낳지 못함과 동시에 여성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면서도 한 세상을 맞이하게 되는 경이로움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동시에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가 남성작가가 경험할 수 없는 월경을 표현했듯 모더존 베커는 남성들이 그려오던 정형화된 여성누드가 아닌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자리하는 '어머니'의 누드를 그렸다. <누워 있는 어머니와 아이> 작품을 보면 엄마와 아이라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안겨져있던 그 포근했던 시절이 느껴져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라는 제목이 다소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고 몇몇 화가들의 안타까운 생애는 성별을 떠나 속상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잘 "싸워준'그녀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특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예술가과 멋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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