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늘 스스로가 가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직업이 무엇이냐 묻는 인구조사원에게 ‘가정주부’라고 써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치 있게 생각하기 어렵다.16쪽이 책의 저자는 소설속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며 특히 에우리지시와 기다의 이야기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고백컨데 나는 페미니즘이나 젠더가 들어간 이런저런 이야기에 열광하기는 커녕 수업과 관련된 이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외면했었는지 깨달았다. 그 삶을 살았던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에우리지시와 기다까지 갈필요 없이 엄마와 언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내 이야기, 내 삶의 대부분이 나와 다른 성은 물론 아이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가장 친절한 표현으로 오히려 여성이기에 ‘대접’을 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은 볼 수도 보고 싶어하지 않은 삶이다. 남편의 학대는 그 남편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삶이 가려져있음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가.예전의 기다라면, 자신의 몸에서 금방 떼어낸 암 덩어리 곁에서 잠을 청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종의 저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그때의 기다는 숨 쉴 힘만 있다면 죽음이라도 선택할 사람이었다. 몸을뒤척여 잠에 들었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덩어리가 떨어진다!' 등을 돌려 아이를 안았다. 예전에는 아이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아이만은 지키고 싶다 생각했다. 기다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마침내 평화를 느꼈다. '프란시스쿠, 네가 여기 있어서 참 좋다.이제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었다. 138쪽위의 발췌문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근에 내게도 일어난 일이며 출산 전후로 바뀌는 기다의 사고가 너무나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개인만의 책임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해야하는 일로 받아들일 때의 어떤 일이 일어날 소 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세상에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남성들이 많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일들도 과거에서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왔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은 남녀 누구나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이 아닌 ‘나의 일’을 가지는 것이 남성은 아내와 자녀는 물론 다른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해받아야 하는 일에 속하지 않는데에 반해 여자는 ‘노동’마저도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서두에 말한 ‘대접’받거나 받기를 원하는 일부 여성들만을 이야기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나처럼 제 발등의 불을 보고서야 깨닫는 사람보다 발등의 불을 보고서도 ‘어쩔 수 없음’, ‘다른 사람도 다 같음’이라는 다수의 침묵적 폭력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소설을 읽으며 공감하기는 했지만 그 일들이 진짜 ‘내 이야기, 내 삶’으로 다가왔던 적이 없어서인지 <보이지 않는 삶>이 더 깊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