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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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책의 제목은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지만 리뷰에서만큼은 '나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면 우리라는 공동체적 테두리안에서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회피 혹은 아예 상관없다고 외면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속하기 때문에 '나'로 한정지어 이야기해보련다. 이 리뷰를 통해 저자의 바람처럼 빈곤의 문제가 개인이 아닌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주면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쁠 것 같다.


이 책은 빈곤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을 학생들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빈곤이라는 주제가,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고 가난의 피폐함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를 대안적 연대의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고투해온 활동가들이 점점 한국 사회 공론의장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게 아닌지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8쪽


이 책은 조문영 교수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로 있으면서 2018년 2학기에 개설된 '빈곤의 인류학'에 함께했던 40명의 학생들과 반빈곤 운동단체 활동가들가의 인터뷰를 엮은 내용이다. 활동가들이 연대하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각각 홈리스, 철거민, 장애인, 노점상, 쪽방촌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을 조별로 나누어 인터뷰한 것으로 중점이 되는 사건, 활동의 배경과 현재 등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활동가를 통해 빈곤을 마주하게 된 까닭은 수업이라는 제한적인 측면도 있지만 활동가들의 역할과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용산참사를 기억하는가. 2009년 1월에 있었던 사건으로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다. 10년전이지만 워낙 배경이 화제가 되었던터라 기억하는이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당시 중학생이었으니 이번 활동을 통해 알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각각 나누어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언급할 생각은 없지만 바로 위에 저 문구,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문장은 어쩌면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 사람이 있다.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철거지역의 망루속에 사람이 있고, 쪽방촌에 사람이 있고, 집을 잃고 방황하는 서울역에도 떼잡이가 아닌 사람이 존재했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정부와 경찰청장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망루에서 함께 연대했던 이들이 '공동주범'이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우리는 강의실에서 접하는 빈곤은 막연하고, 빈곤 당사자는 모호한 집단처럼 느껴졌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로는 사회복지와 빈곤의 관계를 넘어서는 상상에 다다르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지금, 여기의 빈곤'을 제대로 보고 만나야 한다. 78쪽

참혹한 사건인줄은 알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철거민협회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보상외에 '추가적'인 이익을 위해 나온 사람들이 더 많았던, 폭력적인 시위였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던가. 철거와 관련해서는 철거민내에서도 연대가 쉽지 않다. 상가주민과 주거민의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상가주민은 빠른 보상으로 경제활동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주거민의 경우는 말그대로 집이 보장되어야 하는것이다. 이때 쉽게 생각하는 것이 보상을 받으면 그 돈으로 집을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근데 만약 세입자라면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당장 집을 구하는 것이 쉬운가. 용산참사의 경우가 이전보다 더 문제가 컸던것은 지나치게 빠른 결정과 철거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는데에 있다. 그런상황에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을 '떼잡이'라고 폄하하고 내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리를 내는 순간 그것이 폭력행위가 되고 떼잡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주민운동은 보이지 않는 빈곤을 의제화하거나 빈곤 당사자들을 발굴해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갖는다. 지역, 마을에는 다양한 주민들이 살고 있고 그 안에 분명 비가시화된 빈곤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147쪽


1970년 전후로 서울에서는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폭력적인 철거가 자행되어 왔다. 시세차익을 통해 부를 이룬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부자가 되고 그때 터전을 잃고 제대로 보상받지 못해 밀려났던 사람들은 타의적 빈곤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운운하며 자립하지 못하는 부정적의미의 의존자들로 치부하며 외면했던 것이다. '태어날 때 가난은 자신의 탓이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은 자신의 탓'이라는 말이 떠돈다. 과연 그럴까. 똑같이 출발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같은 출발선이 아닌데, 사회구조는 계속해서 가난한 이에게 선을 긋고 있는데 저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가해가 되고 폭력이 된다. 그런가하면 노점상을 바라보는'나'의 시선도 얼마나 편협했던가. 노점하는 사람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아파트를 사들일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언론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것이 전부인가. 무언가를 판단하려 할 때 왜 편현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을 '잘 알지 못해서'다. 가난해본 적이 없으니 그들이 무능한 탓이었고, 집이 없는 것은 방탕하게 생활했던 것이며 장애인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외면'하면 지금의 내 삶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몰랐지만,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목소리를 듣게 된 우리,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범주는 달라지고 관계는 새롭게 맺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323쪽

그렇다면 이 책은 온통 '나'에게 외면의 잘못을 따지고 들며 현실을 올바로 못보고있음을 탓하고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알려줄 뿐이다.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나 또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활동가들은 바로 그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한때 낙골이라 불렸던 난곡을 포함한 관악마을단체와 쪽방촌의 동자동 공동체등을 보면 '나'의 외면에서 '우리'로 연대할 때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고 빈곤에서 반빈곤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주민'이 되어 함께 해결하고자 할 때 비로소 '나'는 가난을 더이상 외면하지도 빈곤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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