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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예수 - 평화를 선포하는 〈요한복음〉
김근수 지음 / 동녘 / 2018년 11월
평점 :
평화의
예수 - 평화를 선포하는 <요한복음>

해방신학연구소
김근수 소장이 바라본 요한복음 어떤 내용일까. 사실 이 책을 읽기전까지 해방신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해방신학자들이 바라보는 하느님과 말씀이 어떤 방향인지는 알 것 같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말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이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누리며,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고 굶주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인 삶이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이다.<요한>이 예수가 하느님을 해석한 분이라고 강조한다면,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해석한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37쪽
<요한>을
1부 예수 증언의 책, 2부 예수 영광의 책으로 나누고, 다시 각 부는 1막에서 4막 A, 4막 B에서 7막으로 나뉜다. 1부가 예수 증언의
책인 것은 <요한>1장의 도입부가 창세기와 연결되어 있고,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증언하러 오신 예수의 증언과 관련되어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세례자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증언자 요한이라 부르고 싶다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요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증언하는 우리 사람들은
그렇기에 누가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 없다고도 말한다. 2막은 <요한>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포도주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요한>에서는 7가지의 표징이 등장하는데 첫 기적은 포도주가 바로 그 첫 표징에 해당된다. 4막 A에 해당되는 8장의
내용을 들려준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다른 복음서보다 세 배 더 다루는 셈이다. 자세히 말하면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의 저항과 죽음이다. 저항 없이 죽음 없다.
예수가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공자나 붓다처럼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오랜기간 가르치고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
예수의 저항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59쪽
해방신학으로서
분석한 <요한>이라서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저항'이란 단어에 생각이 깊어졌다.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을 위해 '희생' 혹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죽음을 선택하신 분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내게있어 저항은 의지의 표출이라기 보다는 순종의 반대개념으로 먼저 다가와서 그런
것 같다. 2부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시는 20장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박해
위험 속에서도 선교가 가능했다. 박해 위험을 당하는 상태에서하는 선교가 진짜 선교일 수 있다.
박해를 모르는 선교는 종교 영업 행위로 빠질 수도 있다. 405쪽
한국의
가톨릭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들을 때 마다 자부심을 갖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200여년 전 한국 천주교 초기와 지금은 다르다. '평화'를
기대하는 것과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공동체, 민족 혹은 그 이상의 광대한 전 지구인이 아니라 가족, 심지어 개인 한 사람을 위한
평화에 머물러 있다. 저자가 발췌해온 것처럼 가난한 사람 편에 서서 가난 한 사람을 보호하는 이들만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의 권리를
무시하고 계급을 허물려는 평등의식이 박해를 불러왔다는 것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그동안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성서를 공부하는 나의 자세도, 또 그 진행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왜, 무엇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는가.'라며 서문에서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부터가 그동안의 나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자인 저자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불의로 가득한 세상을 뒤집어엎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12쪽) 덕분에<요한>을 풀이한 본문에 진입하기 전에 프롤로그, 그리고 요한 서문을
해설한 몇 페이지 안되는 적은 분량을 오래도록 읽고 노트에 빼곡하게, 때로는 책에 직접대고 나름의 변명과 답, 혹은 깨달은 바를 적어가며
읽었다. 해방신학자인 저자의 의견에 모두 공감했던 것은 물론아니다. 크게
정리하자면 <요한>을 포함한 성서는 환난시절에 쓰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시절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렸다. 로마에 압제에 시달리던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의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반도는 분단국이며
휴전국이다. 그런 한반도에 마치 유다인들이 그러했듯 우리를 구원해줄 혹은 그럴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바라는 '절실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의 한반도에는 평화가, 그리고 평화의 내용을 담은 <요한>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